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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재산에 전혀 집착하지 않는 것

금산정사 방문기 11
이뭐꼬의 구도 이야기 17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광주역 앞에서 늦은 점심을 간단히 먹고 4시에 광주에서 출발하였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연담 거사와 불교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담 거사는 특이하게도 부인이 교회에 다닌다. 자녀가 둘 있는데, 하나는 아버지 따라 절에 다니고, 하나는 어머니 따라 교회에 다니는 독특한 가정이다. 연담 거사는 그러한 가정 내력 때문인지 이미 기독교 교리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그가 설명하는 불교 이야기는 이해하기 쉬었다.

 

나는 수원대 교수로 오기 전에 국토개발원에서 3년 동안 근무한 적이 있다. 그때 이 과장이라는 분과 차를 마시면서 불교에 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분은 불자로서 불교 공부를 많이 한 분이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었다. “부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일반인의 행동 차이점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깨닫는다면 그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달라지는가?” 내 질문을 들은 이 과장님은 이것은 금강경에 나오는 보물 같은 이야기인데 좋은 질문을 했으므로 나에게만 말해 준다면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연담거사가 설명하는 무주상보시란 세 가지 상(相)에 얽매이지 않는 보시를 말한다. 곧 보시하는 행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깨닫기 전이나 후나 똑같은데 부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보시하는 사람, 보시의 내용, 보시받는 사람에 얽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 가지가 청정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어떤 사람을 금전적으로 도와준다고 가정하자. 무주상보시란 ‘내가 돕는다’라는 생각도 없고, ‘얼마를 돕는다’라는 생각도 없고, ‘누구를 돕는다’라는 생각도 없는 그러한 보시를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도와준다고 생색을 내지도 않고, 많이 도와준다고 자랑하지도 않고, 너에게 도와주니 나중에 은혜를 갚으라는 생각도 전혀 없이 도와주었다는 사실도 금방 잊어버리는 그러한 행동을 말한다.

 

들어 보니 무주상보시는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내가 전에 너를 이렇게 도와주었는데, 네가 은혜도 모르고 그럴 수가 있니?”라는 식의 불평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무주상보시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조건 없이 도와주는 그러한 행동이다. 성경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도와주는 일’이 무주상보시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여기에서도 불교와 기독교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두 종교의 창시자들은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되, 대가를 바라지 말고 조건 없이 도우라는 것을 최고의 실천 덕목으로 가르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교의 ‘자비’나 기독교의 ‘사랑’이나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것이 아닐까? 물론 자비라는 최종 행동을 끌어내고 사랑이라는 최종 행동을 끌어내는 과정으로서의 교리나 이론은 다를지 모른다. 자비나 사랑을 베푸는 목적 또한 다를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서는 불교도의 자비 행위나 기독교도의 사랑 행위나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이라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이렇게 좋은 기회는 다시는 없을 것 같아, 나는 연담 거사에게 무소유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내가 이해하는 무소유 사상은 물건을 소유하게 되면 물건에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법정 스님의 글에 난초를 애지중지 기르다가 어느 비 오는 날, 소유의 번거로움과 무소유의 역리(逆理)를 깨닫고 난초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린 예가 나온다. 내가 이해하는 무소유 사상은 이렇게 요약된다. ‘많이 소유한다고 해서 많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유가 많을수록 많이 얽매이게 된다. 그러므로 적게 소유하는 데에 만족하며 소박하게 사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연담 거사의 무소유에 관한 해석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난초의 예에서, 자기를 그렇게 안달하게 만든 난초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면 그것이 무슨 자랑인가? 난초에의 집착을 끊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면, 받은 사람은 다시 집착하게 될 것 아닌가? 난초라는 번뇌 덩어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고 비난하면 법정 스님은 무어라고 대답하실까?

 

그러므로 연담 거사의 해석에 따르면 무소유 사상은 더욱 큰 뜻이 있다고 한다. 깨닫는 경지에는 여러 단계가 있는데, 무소유는 위에서 두 번째 단계라고 하니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쉽게 표현하여, 무소유는 물건을 소유하고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마음 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연담 거사는 중국 선종의 6조인 혜능(638~713)이 깨닫고 출가하게 된 고사를 이야기해 준다.

 

 

혜능은 글을 모르는 일자무식 나무꾼이었는데, 하루는 시장에서 집으로 가던 중 어느 스님의 ⟪금강경⟫ 독송을 듣게 된다. “머무를 바 없이 마음을 내라”라는 대목에서 깨닫고, 혜능은 출가하게 된다. 곧 ‘마음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로 마음을 쓰는 상태’가 무소유의 정의라고 한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연담 거사는 다르게 설명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난초를 가지고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마음 쓰는 것이 무소유라고 한다. 이러한 무소유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비가 왔을 때 난초가 죽을까 염려가 되어 집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대로 볼일을 다 보고 집으로 가서 난초를 들여놓는 사람이다. 설혹 그 난초가 죽더라도 애달파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무심도인(無心道人)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행동을 무소유라고나 할까? 까마득한 경지였다. 재산을 예로 들면, 재산이 많은 사람이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주고 자기는 적게 가지는 것이 무소유가 아니고, 재산에 전혀 집착하지 않는 것이 무소유라고 한다.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곧 본래부터 내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장학금으로 1억 원짜리 수표를 1만 원 지폐 한 장 주듯이 기증하고도 전혀 자기 마음에 흔적이 남지 않는 그러한 경지가 무소유라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돈을 예로 드니까 겨우 이해가 되는 듯했다. 듣고 보니 결국 무소유도 무주상보시하고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무소유는 구걸하는 거지들이 실천하는 사상이 아니다. 무소유는 누구든지, 부유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그러한 사상 같았다. 나는 연담의 설명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