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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당신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자연의 보상이자 선물, 알밤 줍기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19]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불볕더위 속에 기다린

   가을바람이 살랑 불고

   매미가 떠난 푸른 숲에서

   귀뚜라미 세레나데 울리면

   가을이 성큼성큼 다가옵니다.​

 

   지붕에 뜬 하얀 달덩이

   대청마루에 늘린 빨간 고추

   알밤송이 툭툭 떨어진 숲속에

   다람쥐가 쪼르르 나무를 타면

   가을만찬이 분주합니다.

               ... 박소정, <가을은 당신의 선물입니다> 가운데서

 

 

"가을이구나. 드디어 아들 며느리도 손주들과 함께 모이는구나. 그동안 부쩍 큰 손주들, 이미 가슴을 넘긴 키를 몸으로 대어보고 칭찬을 해주자. 애들도 입맛이 살아나 잘들 먹겠구나. 그 애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더라?" ​

 

지난달 한가위를 앞두고 우리 부부는 고민을 한참을 했다. 애들이 와서 하루건 이틀이건 자고 갈 것인데, 한가위 날 아침을 잘 먹고 나서 애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그네들이 못 보는 것은, 집 주위 산책길에 있는 밤나무에서 알밤을 주워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미 알밤이 거의 다 떨어지고 땅에 떨어진 밤송이들도 짙은 갈색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애들에게 알밤이 들어있는 밤송이를 보여주고 그것을 발라보는 체험을 하게 해주면 좋을 텐데...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대도시에 나와 사느라 알밤이 익는 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고향에 가도 알밤을 주워본 기억이 없었다. 어쨌든 대도시 주택가에 살고 있는 손주들에게는 알밤줍기가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란 생각에 손주들을 무조건 집 뒤 둘레길로 데려가기로 했는데 이미 밤송이가 다 떨어지는 상황이라 이들에게 체험시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 한가위 며칠 전부터 알밤이 박힌 밤송이를 아침마다 찾아보니 겨우 세 송이를 주울 수 있었다. 그것을 집에 가져 와 그냥 두면 다 말라버릴 것 같아 냉장고에 밤송이 채 보관하고는 애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한가위 날 아침 맛있게 다들 풍성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손주들을 둘레길로 이끌고 간다. 아들 며느리도 동참했다. 부인은 냉장고에 넣어둔 알밤송이를 배낭에 넣고 가다가 먼저 가서 세 군데에 나눠 내려놓고는, 시치미 떼고 뒤에 오는 손주들에게 밤송이 찾아보자고 한다. 아들 며느리 손주들 다 찾아보는데 누가 "어, 여기 있네!"하는 소리가 들린다. 곧 애들이 몰려 발로 그 밤송이를 좌우로 분리하고는 알밤을 꺼내 자랑한다.

 

 

 

이런 식으로 미리 심어놓은 보물찾기가 진행되었지만 그래도 뭔가 섭섭했는데 우연히 나도 밤나무 밑을 두리번거리다가 눈높이쯤의 다른 나뭇가지에 걸린 진짜 밤송이를 발견한다. 그 안에 밤이 꽉 차 있는 것이었다. 이것 보라고 하고 흔들어 떨어진 것을 손주들이 달려들어 발로 비벼 알을 꺼내는 순간한가위 아침의 알밤 줍기는 절정을 이뤘다.

 

애들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알밤 송이들을 미리 주워 냉장고에 넣어 보관했다가 다시 산길에 가져온 것임은 알지 못한 채였다. 그런데 막 산길을 나오는데 입구에 서 있던 밤나무로부터 손주들 앞으로 멀쩡한 밤송이가 뚝 떨어지는, 기적 같은 일이 생겨 애들의 환호가 폭포동 골을 흔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은 알밤과 도토리는 다 다람쥐 먹이로 다시 던져주는 것으로 해서 알밤체험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제 매미가 떠나고, 나뭇잎들의 푸른색이 남아있는 숲에서는 귀뚜라미가 세레나데를 울리고 있다. 대도시에 올라와 살기에 지붕에 뜬 하얀 달덩이와 대청마루에 늘린 빨간고추는 보여주지 못하지만, 알밤송이 툭툭 떨어진 숲속에서 다람쥐 대신에 청솔모가 눈앞에서 뛰어노는 광경을 보며 우리 손주들은 가을의 만찬을 맛있게 즐겼을 것이다.​

 

알밤들은 여름내 뙤약볕에 서서 하늘 우러러 두 팔 들고 정성을 모은 밤나무들의 경건한, 간절한 염원 혹은 기도로 얻은 자연의 보상이자 선물이었다. 들판의 곡식도 뜨거운 햇살 아래 덥다고 불평 한 번 하지 않고 묵묵히 시간을 참아내고 인내를 한 결과이니 그것 또한 성실함에 대한 자연의 보상일 터이다.

 

가을은 이처럼 모든 이들에게 성실하게 살면 반드시 그에 상당하는 대자연의 선물이 보상으로 따른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그 선물은, 둘레길의 도토리와 알밤들을 다람쥐나 청솔모, 혹은 새들이나 멧돼지들이 나누어 받아 가서 다가오는 겨울을 이기게 해주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이 골고루 잘 나눠 쓰라고 말해준다. 그러한 원리를 가르쳐주는 것이 가을이다.

 

 

요즘에는 부모님들이 다 농촌이나 산촌 고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도시에도 나와 있기에 명절이라고 꼭 고향을 찾아가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번 추석의 귀성과 귀경행렬에 참가한 차량이 말해주었다. 이제는 농촌만이 아니라 대도시, 중소도시도 아이들에게는 고향이 된 세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한가위는 그런 사정에 맞는 방식으로 즐기고 나누라는 시대다. 고향에서도 도시에서도 가을을 맞이하고 즐기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삶에 대한 새로운 기도를 배우고 가르치면 된다. ​

 

   집 앞 감나무가

   지나가는 가을 앞에 섰습니다

   잎 다 떨군 까만 가지 끝

   올망졸망,

   노란 열매들이 달려 있네요​

 

   땡감, 반시, 홍시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버릴 것도 없다고

   윙윙, 세상 풍파에 맞서고 있네요​

 

내게도 아이들 셋

손자 손녀가 여섯, 그리고 며느리 사위

다 가지 끝 감처럼 내 손끝의 기도입니다.

                                ... 성백군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배우게 하소서

   세상에 태어나 이제 마악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모쪼록 이 한마디 배우게 하소서

   괜찮아 다 괜찮아​

 

   조금은 부족해도 조금은 허점투성이여도

   있는 그대로,​

 

   가을에는 완벽을 사랑하지 않게 하소서

   가을에는 생각도 마음도 익게 하소서​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 홍수희, <가을의 기도>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