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세종 즉위년 10/3)”
‘민본(民本)’의 뜻을 지닌 원문 모두 37건 가운데 세종 8건이다. (‘민위방본(民爲邦本)’은 원문 모두 16건 가운데 세종 3건으로 가장 많다) 세종이 조선 임금 가운데 가장 많다. 성종 1건, 중종 2건, 영조, 정조 각 1건이다.
민본과 관련한 ‘민유방본(民惟邦本)’은 《세종실록》에만 14회 나오고 그 밖에 민(民)이라는 연관어도 백성을 위한 것으로 수십 건이 더 보인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세종 즉위년 10/3)
“백성이란 것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는 것이다.” (세종 1/2/12)
‘민본’은 조선 초기에는 많이 등장하지만 ‘민본’ 모두 37건 가운데 세종 8건, 성종 7건으로 다른 임금의 경우 미약한데 이는 민본(民本)이 중시되지 않았다기보다 다른 대체되거나 일반화했다고 보인다. 민(民)을 일컫는 ‘백성(百姓)’의 경우 세종은 166건, 성종 220건으로 조선 초에 높고 이후 후기인 영조 때 74건으로 차츰 낮아진다. 반면에 ‘서민(庶民)’은 세종 26건인데 후기 영조 때는 72건으로 많아진다. 시대가 지나며 신분에 대한 호칭이 바뀌는 것이다.
백성이라는 큰 범위에서 조선 초 ‘사대부와 천민’이라는 두 신분에서 차츰 천인의 신분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후반에는 백성보다 ‘서민’이라는 말로 대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천인’의 빈도는 세종 때 90건에서 정조 때에는 5건에 불과하다. 시대를 반영하는 신분용어의 변화를 통해 역사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위상 변화를 가져온 노비 제도의 개선은 순조 1년 1월 28일(1801) ‘내노비와 시노비의 혁파를 하교’하는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노비(內奴婢, 궁중 노비) 3만 6천9백 74구와 시노비(寺奴婢, 절에 딸린 노비) 2만 9천 93구를 모두 양민으로 삼도록 허락하고, 인하여 승정원이 노비안(奴婢案, 노비 문서)을 거두어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게 하라.” (순조실록 1/1/28)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는 어휘인 ‘민위방본’보다 더 직접적인 용어는 ‘애민’이다.
연관어로는 애민(세종 85/전체 806건), 친민(세종 8/ 전체 186건), 휼민(세종 117/ 전체1,374), 구민(救民, 세종 42/ 전체 465), 민연(憫然, 세종 2/ 전체 35), 련민(憐憫, 52/전체 112)등이 있는데 세종은 골고루 나타난다. 특히 련민(憐憫)은 세종이 전체의 반으로 세종은 조선의 ‘련민’ 정신의 임금이라 하겠다. ‘련민’은 훈민정음 서문에 나오는 ‘딱하게 여기는’ 마음이라 하겠다.
민본(民本)
세종 정치 철학의 기본 정신으로는 ‘민본’을 들 수 있다. 정치의 최우선을 백성에 두고 백성을 살리는 생생 정책으로 천민(賤民, 지체가 낮고 천한 사람)이나 우민(愚民, 어리석은 백성)을 생민(生民, 일반 국민)으로 만드는 정책이다. 즉위 교서에 ‘시인발정’으로 나와 있고 실천 명제로는 애민ㆍ휼민ㆍ친민ㆍ민위방본 등이 있는데 편민(便民,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 정책이라 할 수 있다. 그 근간에는 련민(憐憫, 세종 1/2/12)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초기 사회구조는 사대부와 서민이라는 두 신분이 있고 그 갈래는 세습적이어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이동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종은 백성을 양인과 천민으로 가르는 벽에 대해 의심하고 가능한 한 그 경계를 허물고 싶어 했다. 이에 세종은 사대부와 양민을 대생적(對生的, 마주나기) 존재들이 아니라 호생적(互生的, 어긋나기) 관계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나뭇잎들 가운데는 서로 엇갈려 나면서 잎이 자라는 종이 있다.)
이에 따라 정치적인 정신으로는 노비도 천민(天民)으로 여기고 있다.
호생이기(好生而已) : 더욱이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 아님이 없으니, 신하 된 사람으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 것인데, 그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임금 된 사람의 덕(德)은 살리기를 좋아해야 할 뿐인데, 무고한 백성이 많이 죽는 것을 보고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금하지도 않고 그 주인을 치켜올리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세종 26/윤/7/24)
다스림은 천도를 따라야 한다. 이에 임금은 하늘을 대신해 하늘이 낳은 백성 곧 천민(天民)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임금은 천도(天道)(우주 자연의 근본원리)에 순응해야 하며...”(세종 12/3/2)
백성은 하늘이 내린 사람들이고 임금은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세종의 인간론이라 할 수 있다.
이에 그 실천의 한 중거로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곤 했다.
“임금이 근정전에 나아가 양로연을 베푸는데 여러 노인에게 명하여 절하지 말라 하고, 4품 이상이 차례로 올라올 때 임금이 일어나서 맞고, 2품 이상은 전내(궁궐 안)에서 동서로 서로 향하여 자리 잡게 하니.., 4품 이상은 월대 위에서 동서로 서로 마주 보게 하니,... 동쪽에는 전 사직(司直) 등에서 노비까지 66인이고, 서쪽에는 전 중랑장(中郞將, 무관 정오품 벼술) 등에서 천인에 이르기까지 65인으로 모두 합계 1백 55인이었다. 잔치가 끝나매 여러 늙은이가 술에 취하여 노래들을 부르면서 서로 붙들고 차례로 나갔다.(세종 15/윤8/3)
세종 15년 4월에는 “임금이 말하기를, 온수현 인민들에게 벼와 콩을 이미 하사하였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조세(租稅)를 감해 주는 것이 좋을 뻔했다. 그러나 다시 고칠 수 없으니, 병든 노인과 환과고독(鰥寡孤獨,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처지의 사람)에게라도 은혜를 더 베풀고자 하는데 어떤가." 하고 이를 시행하기도 했다.(세종 1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