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민보어신(民保於信)
백성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마지막 단계는 나라의 정치 제도가 백성에게 믿음[信]을 주는 일이다. 신(信)은 민본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신(信) :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믿음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처음에는 저화(종이돈)를 보물로 삼아 그것을 쓰게 하였다가, 인제 와서 오로지 돈만을 쓰게 하고 그것을 헛되이 버리게 된다면, 백성 가운데 저화를 가지고 있는 자가 어찌 근심하고 한탄하지 아니하랴.(세종 7/4/14)
처음에는 저화를 쓰게 하다가 지금에 와서 못 쓰게 한다면 이는 백성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 강조하고 “민간에 돈을 주고서 저화를 거둬들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한다. 백성이 정부의 시책을 따르게 하려면 국가가 먼저 믿음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믿음/신(信) : 그윽이 생각하건대 나라는 백성에게서 보전되고, 백성은 믿음에서 보전되는 까닭으로, 임금님의 정사(政事)는 반드시 믿음을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세종 9/1/26)
가뭄으로 그만두기로 한 강무를 병조의 계로 다시 강무하는 데 관해 정지시키자는 상소가 올라온다. 강무를 해야 하는 것, 백성의 노고를 생각하지 않는 두 주장에 다 ‘믿음’을 내세우니, 그래서 토론의 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신의 : 신의(信義)를 백성들에게 보이는 것이 못됩니다. 신의란 것은 임금의 아주 귀중한 보배입니다. 나라는 백성에게 보전되고 백성은 신의에 보전된 까닭으로, 임금의 말은 반드시 신의에 따라야 합니다. (세종 9/9/22)
세종 11년의 기록은 이미 기술한 바 있는 불교 도첩(度牒)의 법에 대하여서이다.
믿음/신(信) : 신 등은 그윽이 듣건대, 믿음이라는 것은 임금의 귀중한 보물로서, 나라는 백성으로부터 보전되고 백성은 믿음으로 보전된다고 합니다.(세종 11/9/30)
∙ 신하를 둘러싼 신의 계
(임금이 이개를 남대문 밖 신이충의 집에 두겠다고 하자, 대간이 파면해 주기를 청하다) “대사헌 최사강과 좌사간 박안신 등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임금님께서 교지 하시기를, ‘장차 이개(李 )를 문밖에 두겠다.’ 하시므로, ‘신 등은 명령을 기다린 지가 며칠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 개( )를 남대문 밖 신이충(愼以衷)의 집에 두려고 한다." 하였다. 사강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은 먼 지방에 두어서 그 기미(幾微)를 막으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이충(以衷)의 집이라면 성(城) 밑에 가까이 있고, 재상(宰相, 이품 이상의 벼슬아치)ㆍ조사(朝士 조정 벼슬아치)의 집이 자못 그 곳에 많이 있으니, 어찌 내쫓은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또 믿음이란 것은 임금의 큰 보배이온대, 이미 내쫓는다고 하시고는 그곳에 두신다니 이는 식언(食言)으로 신 등을 속이는 것이오니, 〈서로〉 믿음이 어찌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처음 마음은 이처럼 처리하고자 아니하였는데, 지금 경들의 간언 때문에 그곳에 두고 ‘내쫓는 것이라[放黜]’ 이름한 것이니, 먼 지방에 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사강(士康) 등이 두세 번 굳이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대간(臺諫)이 연명으로 글을 올리기를, "그윽이 생각건대 나라는 백성에게서 보전되고, 백성은 신(信)에서 보전되는 까닭으로, 임금님의 정사(政事)는 반드시 신(信)을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양녕대군 이제(李禔)는 이미 종사(宗社)에 죄를 지어 태종께서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시어 밖으로 내쫓았으니, 진실로 전하께서 사정을 쓸 수 없는 것입니다.“(세종 9/1/26)
이런 인사 문제를 둘러싸고 임금과 신하 사이의 믿음의 관계로 논하는데, 신하는 원칙을 주장하고 임금은 가) 신하를 두루 끌어안아야 한다는 사실 나) 당장 눈앞의 일에서만 인재를 평가하지 않고 장기적이고 다른 방면에서 활용할 방안을 확보하고 있어야 하고 다) 멀리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갈등이 있기 마련이고 어진 임금이란 이를 조정할 능력이 있는 임금일 것이다.
또 다른 신의의 예는 찬반이 따를 수 있는 신의의 예다.
(그만두기로 한 가을철 강무를 다시 시행하기로 한 것을 정지하자고 지사간 김학지 등이 상소하다) 지사간(知司諫) 김학지(金學知) 등이 상소하기를, "강무(講武)라는 것은 군정(軍政)에서 중대한 일로 여기는 것이 온 데, 그것이 위를 섬기는 것은 종묘(宗廟)를 주(主)로 삼으니 진실로 폐지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강무(講武)할 때를 당할 적마다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손상(損傷)시키는 일은 모두 덜어서 줄이시었는데, 더구나 금년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몹시 가물어 비가 오지 않아서, 백성들이 농업을 잃었으므로 전하께서 일찍이 가을철의 강무를 정지한다고 하시어, 임금의 말씀이 이미 사람들의 이목에 전파되어 있는데, 지금 병조의 계(啓)로써 다시 강무한다는 명령을 내리시니 신의(信義)를 백성들에게 보이는 것이 못됩니다. 신의(信義)란 것은 임금의 아주 귀중한 보배입니다. 나라는 백성에게 보전되고 백성은 신의에 보전된 까닭으로, 임금의 말은 반드시 신의에 따라야 합니다. 말이 간혹 신용이 없으면 아랫사람이 받아 행할 것이 없게 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이번의 일을 정지시켜 백성의 기대를 위로하소서." 하였다. (세종실록 9/9/22)
이런 예는 이 밖에도 있다, 신하는 눈앞의 현실을 임금은 국가의 먼 미래까지 보아야 한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종은 때로는 훈련을 원칙대로 수행하고 때로는 연기를 하는 대안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와 비슷한 예가 있다.
격구를 폐하자는 사간원의 청을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세종실록 7/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