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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날래다’와 ‘빠르다’

<우리말은 서럽다> 14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그림씨(형용사) 낱말은 본디 느낌을 드러내는 것이라, 뜻을 두부모 자르듯이 가려내는 노릇이 어렵다. 게다가 그림씨 낱말은 뜻덩이로 이루어진 한자말이 잡아먹을 수가 없어서 푸짐하게 살아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세기 백 년 동안 소용돌이치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선조들이 물려준 이런 토박이말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뒤죽박죽 헷갈려 쓰는 바람에 힘센 낱말이 힘 여린 낱말을 밀어내고 혼자 판을 치게 되니, 고요히 저만의 뜻과 느낌을 지니고 살아가던 낱말들이 터전을 빼앗기고 적잖이 밀려났다. ‘날래다’와 ‘이르다’ 같은 낱말들도 6·25 전쟁 즈음부터 ‘빠르다’에 밀리면서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날래다’와 ‘이르다’가 ‘빠르다’에 자리를 내주고 자취를 감출 듯하다. 우리네 정신의 삶터가 그만큼 비좁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빠르다’는 무슨 일이나 어떤 움직임의 처음에서 끝까지 걸리는 시간의 길이가 짧다는 뜻이다. 일이나 움직임에 걸리는 시간의 길이가 길다는 뜻으로 쓰이는 ‘더디다’와 서로 거꾸로 짝을 이룬다.

 

‘날래다’는 사람이나 짐승의 동작에 걸리는 시간의 길이가 몹시 짧다는 뜻이다. 동작에 걸리는 시간의 길이가 아주 길다는 뜻으로 쓰이는 ‘굼뜨다’와 서로 거꾸로 짝을 이룬다. ‘이르다’는 대중이나 잣대로 그어 놓은 때보다 앞선다는 뜻이다. 대중이나 잣대로 그어 놓은 때보다 뒤떨어진다는 뜻으로 쓰이는 ‘늦다’와 서로 거꾸로 짝을 이룬다.

 

 

‘빠르다’와 ‘더디다’는 일이나 움직임의 처음에서 끝까지 걸리는 시간의 길이가 짧으냐 기냐에 따라 갈라지고, ‘날래다’와 ‘굼뜨다’는 사람이나 짐승의 동작에 걸리는 시간의 길이가 짧으냐 기냐에 따라 갈라진다. 그리고 ‘이르다’와 ‘늦다’는 잣대로 그어 놓은 때보다 앞서느냐 뒤서느냐에 따라 갈라지는 것이다.

 

이렇듯 저마다 서로 뚜렷이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6·25 전쟁을 지난 뒤로 ‘빠르다’가 동작에 걸리는 시간의 길이를 나타내는 ‘날래다’와 잣대로 그어 놓은 때보다 앞섰다는 ‘이르다’의 터전으로 슬슬 밀고 들어와 자리를 빼앗고 있다. 그리고 본디 짝이었던 ‘더디다’를 버리고 ‘느리다’를 새로운 짝으로 삼아서 ‘굼뜨다’까지 밀어내고 있다.

 

그러니까 ‘빠르다’는 ‘날래다’와 ‘이르다’를 밀어내고, ‘느리다’는 ‘더디다’와 ‘굼뜨다’를 밀어내고 있다는 말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요즘에는 이들 ‘빠르다’와 ‘느리다’ 짝이 ‘이르다’와 ‘늦다’의 터전으로도 밀고 들어오고 있다. 우리가 돌보고 가꾸지 않는 사이에 우리 토박이말의 터전은 이처럼 망가지게 되었으며, 그만큼 우리네 마음속의 느낌과 생각과 뜻이 흐릿하고 무뎌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