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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명고수(名鼓手) 송원조를 만나다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67]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까지는 화관무(花冠舞)라는 춤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화관무란 글자 그대로 꽃으로 만든 화려한 관을 쓰고, 추는 춤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하한 서도의 춤 사범, 민천식은 황해도 해주 지역 기녀들이 추어오던 화관무라는 춤에 탈춤과 교방무(敎坊舞)의 양식을 더해 완성도 높은 춤으로 재탄생시켰다, 그것은 호방한 한삼의 뿌림이라든가, 유연한 몸놀림 등, 궁중무의 절제된 ‘규칙’이라든가 민속춤의 ‘자유로움’을 갖추고 있으며 서도의 삼현육각(三絃六角)으로 반주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춤이라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최승희, 김정순, 배뱅이굿의 이은관, 재담의 김뻑국, 김실자, 김나연, 외 수많은 춤꾼, 소리꾼 등이 그에게 춤과 노래를 배웠다. 민천식은 화관무 말고도 봉산탈춤을 세상에 알려서 동 종목이 국가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로 지정받는 데 크게 이바지하여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인정서를 받는 당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예인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의 제자, 김나연(현, 화관무 명예보유자)은 말한다. 선생은 “춤을 가르치면서도 늘 애국심을 강조해 주셨어요. 화관무는 태평성대를 소원하는 춤이라는 점도 이야기해 주셨지요.“ 바라건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진 이 춤이 보유자 차지언을 중심으로 더더욱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야기를 바꾸어 이번 주에는 <판소리 고법의 서울시 문화재>인 송원조 고수를 만나 보기로 한다.

 

‘판소리 고법의 서울시 문화재’란 말이 다소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아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간다. 먼저, 판소리란 소리판이나 무대에서 <춘향가>나 <심청가>와 같은 긴 이야기를 동작과 함께 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긴소리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리를 연희할 때는 장고가 아닌, 반드시 소리북 반주에 맞추어 부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고법(鼓法)이란 북 치는 법, 북으로 반주하는 법이다. 그리고 서울시 문화재란 서울지방에서 인정한 무형의 문화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판소리 고법의 서울시 문화재>란 말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판소리 북 치는 법의 예능보유자를 의미하는 말이 다.

 

 

서울시에서 인정한 고법의 예능보유자는 모두 2인인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송원조(宋元助1938~ ) 명인이다. 송원조는 군산에서 태어나고 김제에서 자랐다. 그가 판소리나 북을 치는 고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침저녁으로 이러한 소리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부터 친숙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배경을 말한다.

 

그는 날마다 아침, 학교에 가고 오는 길에 <이리국악원>을 지나게 되었는데, 학교를 오고 가는 길목에 국악원이 있었으니, 그곳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다양한 소리들을 담 너머로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송원초뿐만이 아니라, 그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연스럽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떤 날은 기분 좋은 즐거운 소리, 때로는 우는 소리, 어떤 날은 농사관련 일소리나 상여소리도 들렸다. 어떤 사람들이 부르는가? 궁굼함을 느꼈다면 이미 관심이 생긴 것이다. 그 역시 현장을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터다.

 

어느 날, 송원조는 용기를 내어 국악원 안을 들어가 보았다고 한다. 그 안에서는 소리 선생(최광렬)이란 분이 학생 몇 명을 대상으로 소리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가까이서 직접 그 소리를 들어보니 더더욱 자신도 모르게 배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송원조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소리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처음 만난 소리 선생 최광렬은 정정렬 명창의 제자로 한문에 능한 분이었고, 소리를 잘 가르치는 분이었다. 자신과 함께 배운 동학으로는 목포의 안애란, 군산의 김수연(김복녀) 등을 비롯하여 여러 명으로 기억하고 있다. 선생은 창도 잘하였고, 소리북도 매우 능했으며, 한학(漢學)도 공부한 분이어서 배울 부분의 가사를 써 주고 내용을 이해시키고 난 다음, 소리를 가르쳤다.

 

 

송원조는 이곳에서 정정렬제 춘향가를 배웠다고 한다. 당시 국악원 사범들로는 최광렬 외에도 강종철, 김동준, 주봉신, 이성근 등 등이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송원조도 소리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국악원에서는 송원조에게 총무를 맡겼다. 총무가 되면 수업료를 내지 않고 소리를 배울 수 있었고, 거의 국악원에서 생활할 정도가 되었다.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에서 생활한 지 4~5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전라북도 고법 예능보유자를 지냈고, 박동진 명창의 전속 고수였던 주봉신이 “자네는 목이 안 좋으나, 북을 잘 치니까 북이나 치소”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이 말은 송원조가 처음 듣는 소리가 아니었다.

 

얼마 전에는 김동준도 그 비슷한 말을 해 주어, 소리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떨어지고 있던 차였다. 스스로 소리꾼으로서의 재능에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목이 좋지 않으니 명창의 길, 소리의 길을 포기하고 고수의 길을 선택하라는 충고를 또다시 듣게 되니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최광렬 선생과 의논하기로 했다. 그런데 선생의 생각도 같았다. “나도 너한테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라는 대답을 듣고는 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때부터 송원조는 최광렬 선생에게 북을 배우기 시작했다. 앉은 자세에서부터, 가락, 북에 대한 이론까지 송원조는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워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