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동천(洞天)’이란 말이 있다. 동(洞)이란 글자는 골짜기를 뜻한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사는 세계, 또는 산에 싸이고 물이 흐르는 내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을 말한다. 멋진 산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그런 산수경관이 연속으로 펼쳐지는 곳을 동천이라고 한단다. 본래 도교에서 쓰던 말인데 유학자들도 학문의 근본 목적인 본래 심성을 되찾아 안심과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장소, 요즘 말로 하면 치유를 위한 으뜸 공간으로 생각하고 이곳을 찾는 즐거움을 추구하곤 했다.
이 세상에서 이른바 신선(神仙)이라고 하는 자를 본 사람이 누가 있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신선이 사는 곳이야말로 그지없이 즐거울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곳의 정경을 극구 묘사하곤 하는데, 가령 안개와 노을에 잠겨 아스라이 떠 있는 바다속의 삼신산(三神山)이라든가 궁실이 영롱(玲瓏)하게 솟아 있는 땅 위의 각종 동천(洞天 신선이 사는 곳)에 대한 기록을 접하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면서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 최립 「징영당(澄映堂) 십영(十詠)에 대한 서문(序文)」 《간이집》 제3권 / 서(序)
산이 높고 골이 깊으면 이러한 동천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고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이어지는 영남지방에는 특별히 이런 동천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남지방에서 으뜸 동천은 경남 거창에 있는 ‘안의삼동(安義三洞)’이란 세 개의 동천이다. 그 가운데 하나인 원학동 계곡은 넓은 화강암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와 숲이 어우러져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이곳의 계류 위로 높이 솟아오른 바위를 수승대(搜勝臺)라고 하는데 원래 이름은 수송대(愁送臺)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을 와보지도 않은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해서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는 사연이 있다.
1543년 이곳 수송대에서 멀지 않은 거창 영송(迎送)에 내려와 살던 퇴계 이황의 장인인 권질(權礩, 1483~1545)이 회갑을 맞는다. 퇴계의 두 번째 부인 안동권씨의 아버지인 권질은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실정(失政)을 폭로한 언문투서사건이 일어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한 뒤 풀려나 복권되어 현릉참봉(顯陵參奉) 등을 역임했으나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이후 다시 예안(禮安)으로 유배되었다가 17년 뒤 유배가 풀리자, 가족을 이끌고 처가 마을인 거창 영승으로 옮겨 살고 있었다.
퇴계는 이즈음 중종대왕과 조정 신하들의 신망을 받으면서 강원도와 충청도 재상어사를 역임하는 등 중앙 관직에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가 1543년 초 장인의 회갑을 맞아 1월 4일 거창을 찾아서 회갑연에 참석하였다. 장인이 사는 마을은 본래 신라와 백제 사신을 맞고 보내는 곳이라고 하여 영송(迎送)마을로 불렀고, 장인은 이곳에 작은 정자를 짓고 사위가 준 사락정(四樂亭)이란 호(號)를 살려 이름을 붙여놓았는데 퇴계는 이 동네의 이름이 손님이 떠나고 맞이한다는 뜻의 이름보다는 마침 계절이 초봄이므로 멋진 봄의 경치를 맞이한다는 뜻의 영승(迎勝)으로 바꿔주고, 그 뜻을 시로 만들고 글씨도 써주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15리쯤 떨어진 곳에 동갑의 시골선비인 신권(慎權 1501~1573)이 살고 있으면서 수송대란 멋진 계곡 옆 요수정(樂水亭)을 방문해달라고 제안했기에 가보려고 했지만, 임금이 급히 부른다는 소식에 사흘 만에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에 경치를 못 보는 아쉬움에, '수송대(愁送臺)'란 이름도 그 옛날 백제와 신라 사신을 떠나보내며 아쉽고 슬퍼한다는 유래가 있는데, 이별의 슬픔을 기억하기보다는 기왕이면 유명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 즐긴다는 뜻으로 발음도 비슷한 '수승대(搜勝臺)'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시(詩)에 담아 이 동네 선비들에게 보낸다.
搜勝名新換 수승이란 새 이름으로 바꾸니
逢春景益佳 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구나
遠林花欲動 저 먼 숲속 꽃들은 막 피려 하고
陰壑雪猶埋 응달진 골짜기엔 눈이 남아있구나
未寓搜尋眼 이 몸 수승대에 가보지 못했기에
唯增想像懷 마음속 상상만이 늘어가는구나
他年一尊酒 언젠가 술 한 동이 메고서
巨筆寫雲崖 큰 붓으로 벼랑 그려보리라
... 이황, 寄題搜勝臺 수승대에 대해 시를 지어 부치다
그러자 신권 등 동네 선비들은 퇴계가 준 이름대로 이름을 고쳐 부르면서 그에 따른 화답시를 짓기도 한다. 그렇지만 퇴계나 신권과 나이가 같은 동시대인으로 근처 갈천(葛川)에 살던 임훈(林薰, 1500~1584)은 퇴계가 이곳에 살지도 않으면서 이름을 바꾸자고 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으냐며 시를 지어 이를 은근히 비틀어 본다.
花滿江皐酒滿樽 강가에 꽃 가득하고 동이에 술도 가득한데
遊人連袂謾粉紛 벗 하자고 소매 잡아도 분분히 뿌리치네
春將暮處君將去 봄은 저물고 나면 그대도 곧 떠나리니
不獨愁春愁送君 봄 보내는 것에 그대 보내는 시름도 있다네
... 임훈, ‘수송의 뜻을 풀어 그대들에게 보인다(解愁送意以示諸君)’,
맨 마지막 한문 원문을 보면 수송대라는 옛 이름을 언급하며 곧 봄이 가는 것만 시름이 아니라 수송이란 이름이 사라지는 것도 시름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멋지게 살려놓았다.
아무튼 그런 사건도 있지만 당대 학자가 지어준 '수승대'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마을 후손들 가운데는 '수송대'란 옛 이름을 지키고 싶은 사람들도 있어서 그런 사연들이 수송대 거북바위에 가득히 시로 새겨져 있다. 퇴계의 시를 받아 새로 화답해 지은 시가 13편, 임훈의 시를 받은 것이 3편, 신권의 시를 받은 것이 3편 등 20편 가까이가 새겨져 있고 그런 한 가운데에 수승대와 수송대라는 글씨가 나란히 크게 새겨져 있다. 말하자면 이 공간은 이별의 슬픔을 기억하던 공간에서 봄을 맞는 공간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받은 역사를 담고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봄이 한창 오는 요즈음 수승대 앞 원학동 계곡에도 봄이 한창일 것이고 녹수는 더욱 짙어질 것이다. 수승대란 이름에 얽힌 사연을 접하다 보면 퇴계가 왜 그렇게 새로운 이름을 많이 지어주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퇴계는 고향인 안동이나 영주뿐 아니라 단양에서도 팔경의 이름을 짓는 등 곳곳에서 새로운 이름을 많이 지어놓았다.
이번 수승이란 이름을 찾은 사연에서 보면 퇴계는 이별의 서글픔이나 슬픔 같은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새봄을 맞아 마음이 활짝 열리고 멋진 계절에 사람들의 마음과 심성이 더없이 맑게 열리는 것을 바라고 있었기에 이런 이름을 곳곳에 주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실 퇴계의 새 이름 이후에 수승대는 예전 이름보다는 더 활기찬 면모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누가 붙였든 간에 밝고 좋은 뜻으로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대로 산천이 아름다운 것은 거기에 아름다운 사람들의 역사와 이야기가 있어서 더 아름다운 것이다. 수승대라는 이름에 얽힌 퇴계 이황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우리의 자연을 조금은 흉하거나 덜 아름다운 이름보다는 더욱 아름답고 길(吉)한 이름으로 불러야 이 땅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말이 이해된다.
그런데 살면 우리도 신선처럼 맑고 좋은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땅을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나라로 만들고 싶다는 퇴계의 염원이 수승대라는 이름이 새로 등장해 정착하는 역사 속에서 읽힌다. 그런 퇴계의 염원을 우리가 소중하게 대하며 지켜나가는 것도 좋겠는 생각을 꽃이 활짝 피고 잎이 무성해지는 이 좋은 봄날에 해보게 된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