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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필 무렵》 허생원ㆍ동이의 여정을 쫓아서

효석문학100리길 제1구간 답사기 (1)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들어가는 말>

필자는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2015년에 귀촌하여 살고 있다. 우리나라 단편소설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메밀꽃 필 무렵》을 쓴 가산 이효석은 1907년에 봉평에서 태어났다. 가산은 평창읍에서 하숙하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가산은 개학이 될 때, 그리고 방학이 될 때면, 봉평에서 평창읍까지 100리 길을 아버지를 따라 걸었다고 한다. 평창군에서는 가산이 걸었던 옛날 길을 둘레길로 조성하여 2012년부터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필자는 평창에 사는 지인들과 함께 두 주에 한 번씩 ‘효석문학100리길’을 걷고 있다. 필자가 투고하는 답사기는 한 주에 한 꼭지씩 5달에 걸쳐서 연재할 예정이다.

 

답사 날짜: 2024년 4월 8일(월)

답사 참가자: 김수용 윤상조 윤석윤 이상훈(필자) 전선숙 최동철 황병무 (7명)

답사기 쓴 날짜: 2024년 4월 29일

 

‘효석문학100리길’이 있는 평창(平昌) 지명을 조사해 보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강원도는 본래 예맥(濊貊)의 땅인데 후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시대 평창군의 이름은 ‘우오현(于烏縣)’이었으나 신라 진흥왕 때에 신라의 영토가 되고 ‘백오현(白烏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백오현을 ‘평창현(平昌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평창이라는 이름이 유지되고 있다. 1979년에 평창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현재 평창군은 1읍 7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봉평(蓬坪)은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 1907~1942)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봉평은 서쪽에 있는 태기산(泰岐山)의 기와 남쪽에 있는 마을 이름 의풍포(義豊浦)의 풍자를 따서 기풍면(岐豊面)으로 불리었다. 그러다가 현재 봉산서재(蓬山書齋)가 위치하고 있는 산인 봉산(蓬山)의 첫 글자 봉과 봉산이 있는 마을 이름 평촌(坪村)의 첫 글자 평을 따서 봉평(蓬坪)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효석의 생애는 《이효석 단편소설집》 (2019, 이효석문학선양회 발행) 첫머리에 ‘가산 이효석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그 소개를 시작한다.

 

가산 이효석 선생은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산 선생의 아버지는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지식인으로 1906년에 서울을 떠나 봉평으로 이사를 온 후 첫아들로 가산 선생을 낳았습니다. 가산 선생은 어린 시절 한문 서당을 다니면서 옛날 이야기책을 많이 읽으며 문학의 꿈을 키웠습니다.

 

가산 선생은 여덟 살 되던 해 봉평에서 백리나 떨어진 평창읍의 평창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부모님을 떠나 생활합니다. 하숙생활을 하던 초등학교 시절 가산 선생은 학교 성적이 뛰어나 우등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학교였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무시험으로 입학합니다. 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가산 선생은 항상 우수한 성적을 유지해 졸업식 때 우등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시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문학작품을 열심히 읽으면서 시와 짧은 소설을 썼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이효석의 생애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인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학창시절을 지냈다. 그런 다음 당시 유명했던 문인들과 함께 문학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소설을 열심히 썼고 소설가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이효석은 결혼하고 소설을 쓰면서 생활했으나 매우 가난한 삶을 산 것으로 이어진다. 계속해서 ‘가산 이효석의 삶’은 그 이후의 삶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가난한 생활로 힘들던 가산 선생은 1932년 처가가 있는 함경도 경성의 경성농업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하면서 서울에서 함경도로 옮겨 살게 됩니다. 함경도에서 가산 선생은 여유롭게 4년을 살면서 아름다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1936년에 평양에 있던 숭실전문대학(현 숭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취임하면서 문학 활동에 전념합니다. 평양에 살던 그때 대표 작품인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면서 우리나라 최고의 소설가로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삽니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며 문학에 전념하던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1940년 건강하던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곧이어 둘째 아들인 영주가 세상을 떠납니다. 가산 선생은 아들과 아내를 잃은 슬픔에 방황하며 힘겹게 생활을 이어가던 중 회복할 수 없는 병을 얻어 1942년 5월 25일 세상을 떠납니다. 그때 가산 선생의 나이는 서른여섯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후 가산 선생의 묘소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묘소 자리로 영동고속도로가 나면서 1973년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로 옮겨졌다가, 영동고속도로가 확장되면서 1998년 경기도 파주시 경모동화공원으로 옮겨졌습니다. (필자 추가: 무덤은 마지막으로 2021년 11월 이효석 생가 뒷산에 이장되었다.)

 

강원도 평창군은 이효석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기리기 위해 1999년부터 '효석문화제'를 열기 시작했다. 또한 2000년에는 ‘이효석문학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시상하고 있다. 평창군은 2012년에 총사업비 4억 7,000만 원을 들여서 총길이 53.5km에 달하는 ‘효석문학100리길’을 둘레길로 조성하였다.

 

나는 2015년 8월에 수원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한 뒤 봉평면에 작은 집을 짓고 귀촌하여 각시와 함께 살고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효석문학100리길’을 꼭 한번 걷고 싶었다. 어느 날 나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한 뒤 덕거리로 귀촌한 황병무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평창군 문화관광 해설사로 근무하는 황병무 선생과 나는 의기투합하여 이번 답사를 계획하였다.

 

‘효석문학100리길’은 여섯 구간으로 나누어진다.

 

제1구간: 문학의 길, 평창군 관광안내센터~용평여울목, 7.8km

제2구간: 대화 장터 가는 길, 용평 여울목~대화 땀띠공원, 13.3km

제3구간: 강 따라 방림 가는 길, 대화땀띠공원~방림농공단지, 10.4km

제4구간: 옛길 따라 평창강 가는 길, 방림농공단지~용향리경로당, 10.2km

제5-1구간: 마을길 따라 노산 가는 길, 용향리경로당~평창바위공원, 7.5km

제5-2구간: 평창바위공원~평창전통장, 4.3km

총거리 53.5km

 

 

평창군에서 발행한 홍보용 소책자(총 12장)에서는 ‘효석문학100리길’을 간단하게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효석문학100리길’은 가산 이효석 선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속의 인물인 허생원과 동이의 여정을 쫓아 강과 들, 숲 등 옛길을 따라 걸으며 평창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는 길입니다.

 

‘효석문학100리길’ 제1구간은 ‘문학의 길’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소책자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문학의 길은 가산 이효석 선생의 문학적 발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구간으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실제 배경지인 봉평 효석문화마을은 그 자체로 문화의 향기가 흐르는 곳이다. 장돌뱅이와 성씨 처녀의 사연이 있는 물레방앗간과 메밀꽃밭, 이효석 생가마을, 이효석문학관 등을 둘러보고 주변 경관이 수려한 흥정천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치 소설 속에 와 있는 듯한 설렘을 느낄 수 있다.

 

 

2024년 4월 8일 아침 10시에 평창군 관광안내센터 가까이에 있는 식당(봉평허생원 메밀막묵수)의 주차장에 7명이 모였다. 대부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어서 짧게 자기소개를 하였다. 이날 답사 참가자들이 평창에 귀촌하여 산 기간은 길게는 20년 짧게는 2년까지 각각 달랐다. 답사자 모두의 공통점은 첫째로 현직에서 물러났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나이가 모두 60을 넘었다는 점이다. 일행 가운데 최연장자는 79살이고, 참가자들의 평균 나이는 아마도 70살을 넘을 것 같다.

 

 

슬기말틀(스마트폰)이 나온 이후 세상이 엄청나게 달라졌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기기 안에 이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가 다 들어있다. 여러 가지 앱을 사용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 옛날에는 낯선 곳을 찾아가려면 종이 지도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슬기말틀로 해결된다. 카카오맵에서 ‘효석문학100길 1코스’라고 입력하면 제1구간의 코스가 빨간색으로 표시된다. 이 지도를 확대하면 상세한 경로가 나타나서 그대로 따라만 가면 된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아침 10시 10분에 출발하였다. 날씨는 전형적인 초봄 날씨다. 구름이 끼어 햇빛은 비치지 않고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다. 기온은 15도 정도로 걷기에 좋은 날씨이다. 평창은 고도가 높아서 봉평에서 9년 동안 산 경험으로 비추어 보면 절기가 서울에 견줘 3주 정도 느리다.

 

서울에서는 벚꽃이 이미 졌다지만 여기는 아직 벚꽃이 피지도 않았다. 진달래나 산수유 등 벚꽃보다 먼저 봄을 알리는 꽃조차 아직 피지 않았다. 활엽수 나뭇가지에서 나뭇잎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숲을 바라보면 겨울의 숲과는 확실히 다르다. 초록색 안개가 옅게 낀 듯 초록 기운이 느껴진다. 강원도 산골 마을 봉평에도 봄이 오기는 오는 모양이다.

 

자동차가 다니는 큰길에서 소로로 접어들자마자 ‘효석문학100리길’을 확인해 주는 조형물이 보인다.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제부터는 표지판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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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에서 가장 경관이 좋다는 팔석정(八夕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