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황희, 장영실, 김종서, 성삼문 …
세종시대에는 많은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다. 정말 인재의 춘추전국시대라 할 만큼 인재도 많았고 업적도 많았다. 이는 물고기가 물을 만나듯, 잠재력이 충분한 인재들이 세종이라는 뛰어난 주군을 만나 이뤄낸 성과였다.
그러나 이런 수많은 인재 가운데서도, 이예의 이름은 퍽 낯설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도 들어본 적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예는 왜구가 잡아간 조선인 포로를 찾아오고, 43년 동안 조선이 일본에 보내는 사절단인 통신사로 파견되어 양국의 평화로운 관계유지를 위해 활약한 외교관이었다.
이런 이예의 활약을 담은 최정희의 책, 《나는 조선의 외교관이다》는 세종시대 외교를 이끌었던 그의 집념과 노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세종은 언제나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예를 각별히 아끼고 신임했고, 한평생 외교에 헌신한 공로로 원래 작은 고을의 아전이었던 그는 종2품의 높은 벼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는 중인이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던 시절, 그의 능력과 인품이 얼마나 출중했는지 보여준다. 한 해가 멀다 하고 험한 뱃길을 뚫고 일본을 드나들며 대일외교에 모든 걸 쏟아부은 그의 열정 덕분에 세종조의 대외관계는 평화로웠고, 왜인들은 함부로 조선 백성을 해치지 않았다.
이예는 고려 말, 울산에 있는 한 고을에서 태어났다. 이예가 어릴 때 왜구가 마을에 침입해 어머니를 잡아간 뒤에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는 어렵게 자라 아버지 뒤를 이어 아전이 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 사무를 보는 직급이 낮은 관리였다.
이예가 19살 되던 해, 최영 장군을 물리치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울산 아전이었던 그에게 찾아온 첫 번째 위기는 왜구의 침략이었다. 조선에 정착하겠다며 찾아온 왜구를 조선 조정이 선뜻 받아들이지 않자, 갑자기 돌변해 고을과 관아를 닥치는 대로 약탈한 것이다.
울산 군수 이은이 인질로 일본에 끌려가게 됐다. 이예는 일본 배에 몰래 올라타 인질로 잡힌 군수를 보호했다. 왜구의 우두머리였던 비구로고는 상관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대항하는 이예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그를 살려주었다.
대마도에 이르러 군수 일행과 한 절에 갇히게 된 이예는 살아 돌아갈 때를 대비해 모든 상황을 기록해 두고, 날마다 왜의 말을 익혔다. 그리고 조선에서 온 사절단이 군수 일행의 석방을 촉구하면서 1397년 2월, 이예는 무사히 풀려났다.
(p.70)
“관리가 상전을 지킨다는 것은 위급할 때 나라를 지키는 것과 같다. 군수를 따라가 끝까지 그를 보필한 이예에게 아전의 역을 면제하고 벼슬을 주도록 하라.”
스물다섯의 이예는 이번 일로 뜻하지 않는 6품 계급의 무관벼슬을 받게 되었다. …(가운데 줄임)…
이예는 이 자랑스러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얼마 전 돌아가신 할머니 산소로 달려갔다.
“할머니, 기뻐하세요! 뜻하지 않은 공으로 양반 벼슬을 받아 가문을 다시 일으켰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소원인 어머니를 꼭 찾겠습니다.”
이예는 바다를 보며 다짐하였다.
이예는 1410년(태종 10년)까지, 10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일본에 파견되어 조선인 포로 500여 명을 데려왔다. 지금의 오키나와인 유구국에 가서 강제로 잡혀간 조선 백성 44명을 구해 데려오기도 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한 뒤로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에 참여해 조선군을 승리로 이끄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 밖에도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요구하는 일본의 요구를 슬기롭게 무마하고, 1430년(세종 12년)에는 그동안 바닷길을 다니며 연구한 선박에 대한 정책을 올려 튼튼한 배를 만드는 방법과 왜구를 상대로 싸우는 전법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는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험한 바닷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일했다. 세종 25년, 계해년에는 대마도에 파견되어 그동안의 흐트러진 무역 질서를 바로잡는 계해약조를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계해약조로 그간 발생한 많은 문제를 정리하고, 양국 사이 신의와 예절을 지키는 세세한 조항들이 법으로 명문화되었다. 그동안 가짜 허가증을 만들어 상도덕을 어지럽히고 조선 백성을 괴롭힌 왜구 두목 13명도 함께 잡아왔다.
(p.138)
임금은 이예가 계해조약을 무사히 체결하고 돌아오자, 그 공을 높이 치하하였다.
“이예는 평생을 일엽편주에 의지해 대마도로, 유구국으로, 일본으로 다니며 수많은 포로를 구하고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올곧은 충정과 어려움 앞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와 성실은 훌륭한 외교관리의 본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예에게 종2품 동지중추원사의 벼슬을 내리노라!”
중인 출신이었던 이예는 엄청난 신분의 제약을 뛰어넘고 드디어 종2품(지금의 차관)의 높은 신분까지 오르는 영예를 얻었다.
이로써 이예는 보잘것없는 중인의 신분에서 종2품까지 오르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조선 초기, 세종 때까지만 해도 인재를 발탁하고 능력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는 관행이 있었기에 수많은 인재가 날개를 펴고 일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예가 그토록 대일외교에 헌신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어릴 때 왜구에게 끌려간 어머니를 찾겠다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내 찾지 못한 채 1445년 2월, 향년 73살로 눈을 감았다.
외교관 이예의 삶을 들여다볼수록 ‘이렇게까지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하는 존경심이 든다.
평범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그 누구보다 비범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2010년, 외교부는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이예를 뽑기도 했다.
평화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노고가 뒷받침되어야 국민의 소중한 일상을 지켜낼 수 있다. 그가 일생을 바쳐 이룩한 나라의 안정과 평화는 무척 귀한 것이었다. 진정한 공직자의 자세로 국익을 위해 헌신한 외교관 이예의 일대기를 많은 공직자가, 특히 외교관들이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