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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최명길 평전》에는 찾은 몹시 청렴한 명 사신

오로지 원칙만 고집하는 근본주의, 나라를 망친다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69]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한명기 교수의 《최명길 평전》을 읽으면서 황손무라는 명의 사신을 새로 알게 되었습니다. 보통 중국에서 오는 사신은 대국에서 왔다고 오만불손하고, 조선이 상납하는 선물을 당연하게 받습니다. 그뿐입니까? 조선은 임금의 책봉 문제 등으로 아쉬운 처지에 있을 때 사신에게 뇌물을 상납하는데, 사신들은 당연히 뇌물도 챙길 뿐만 아니라, 선물이나 뇌물이 기대보다 적으면 오히려 이것밖에 안 되냐는 식으로 나왔답니다.

 

인조도 쿠데타를 일으켜 임금이 되었기에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명의 책봉에 매달렸습니다. 그리하여 1625년 6월 명의 사신 왕민정, 호양보가 왔을 때는 인조는 이들을 접대하기 위해 20만 냥 가까운 은을 지출합니다. 거의 2년 치 호조 경비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하니, 정통성 없는 임금 때문에 조선의 등골이 휠 정도였군요.

 

그런데 병자호란이 터지기 직전 1636년 8월 말 사신으로 온 황손무는 그동안의 여느 사신과는 달리 ‘몹시’ 청렴한 인물이었습니다. 얼마나 청렴하였으면 한 교수는 ‘몹시’라는 단어를 썼을 정도였을까요? 황손무는 당연히 뇌물을 요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과도한 접대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접대가 있다면, 술을 즐기며 조선 신료들과 시를 주고받는 수창(酬唱)을 즐기는 정도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귀국할 때는 조선에서 받았던 예물 가운데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 호피로 제작한 휘장 같은 것들은 모두 반납합니다. 와! 망해가는 명나라에 이런 청백리가 있었나요?

 

원래 황손무가 조선에 온 목적 가운데 하나는 조선에서 군사 원조를 끌어내고 청과 싸움을 붙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제 명나라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미 커버린 청과 대적하기에 버거웠기 때문에 조선을 끌어들이려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황손무가 조선에 와서 보니 이미 조선은 청과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역량을 지닌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황손무가 보기에는 조선이 한심스럽게 보였겠지요. 한 교수는 《인조실록》에 실려있는 황손무의 말을 인용합니다.

 

"무릇 경서를 탐구하는 것은 장차 치용하기 위한 것인데 정사를 맡겨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면 시 삼백 편을 외워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저는 귀국의 학사나 대부가 송독하는 것이 무슨 책이며, 경제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뜻도 모르면서 그저 웅얼거리고 의관을 갖춘 채 영달만 누리니, 국도를 정하고 군현을 구획하며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 세금을 경리하는 것들을 왕의 신하 중 누가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으니 한심스럽습니다. 왕에게 지우를 받았기에 변변치 못한 견해를 대략 진달하오니, 왕은 살피십시오."

 

 

황손무의 말을 읽자니 제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요. 이러고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무조건 싸우자고만 해요? 에라이! 척화파 XXX들! 황손무는 1636년 9월 15일 예정보다 빨리 급하게 귀국길에 오릅니다. 청군이 거용관(만리장성에 설치된 관문이자, 요새)을 뚫고 들어와 북경을 포위하고 역대 황제들의 무덤을 파헤쳤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황손무는 귀국길에 조선 조정에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에서 황손무는 청나라가 예가 아닌 일로 곧바로 조선을 협박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청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명과의 의리만 오로지 고집하면 일시적으로 통쾌할 수는 있겠지만, 굳이 망국의 화를 재촉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황손무가 이렇게 조선의 장래를 위해서 청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라고 충고하는데도, 당시 척화파 언관(言官)들은 황손무의 충고를 따르는 것을 ‘백성을 속이고 황조를 배반하는 행위’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한 교수는 이들을 오로지 원칙만 고집하는 근본주의자라고 합니다. ‘근본주의(根本主義!)’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처음에는 근본이 서야 그 사상이나 종교가 확고하게 설 수 있겠지만, 계속하여 근본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면 결국 그 종교나 사상은 도태되고 마는 것이 역사의 진리입니다.

 

황손무의 충고는 짐작하듯이 최명길만 이해합니다. 최명길은 황손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처음에 한 조각 충성심으로 천조(天朝)를 위하고자 했는데, 한때의 의성(義聲, 의로운 목소리)으로 도리어 천조에 해를 끼친다면, 당직(當職, 인조)의 처사가 바르지 못함이니 이것은 진실로 배꼽을 씹으려 하지만 거기에 미치지 못하듯이 후회막급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여전한 바람이 있다면, 보내 주신 자문의 간절한 가르침을 이미 받들었으니 힘을 다해 모책을 고쳐서 감히 병화(兵禍)를 완화시키는 계책을 삼지 아니하겠습니까?"

 

배꼽을 씹으려 하지만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재미있는 비유네요. 요즘도 이런 비유를 쓰나? 저는 처음 들어봅니다. 《최명길 평전》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분통에 책을 던지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전혀 뜻밖에 황손무라는 인물을 알게 되어,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