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0 (금)

  • 구름조금동두천 25.5℃
  • 흐림강릉 25.6℃
  • 구름많음서울 28.2℃
  • 흐림대전 27.4℃
  • 흐림대구 27.1℃
  • 구름많음울산 25.4℃
  • 흐림광주 26.8℃
  • 구름많음부산 28.4℃
  • 흐림고창 25.8℃
  • 제주 27.2℃
  • 구름많음강화 24.6℃
  • 흐림보은 24.6℃
  • 흐림금산 24.9℃
  • 흐림강진군 26.3℃
  • 구름많음경주시 24.9℃
  • 흐림거제 26.6℃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감싸 버렸구나

최치원, <題伽倻山讀書堂(제가야산독서당)>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72]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狂噴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롱산)

   

     미친 듯이 흘러 첩첩 바위 때리며 겹겹 봉우리를 향해 소리치니

     지척에 있는 사람 소리도 알아듣기 어렵구나

     속세의 시시비비 소리 귀에 닿을까 항상 걱정되어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감싸 버렸구나

 

신라말 명문장가 고운 최치원(857 ~ ?)의 시입니다. 제목을 <제가야산독서당>으로 한 것으로 보아, 말년에 가야산에 은거하면서 쓴 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운은 해인사에 머물면서 홍류동 계곡에서 이 시를 썼다고 합니다. 시 내용으로 보아 고운은 책을 읽던 독서당에서 귀를 멍멍하게 소리를 지르며 내닫는 계곡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시상이 떠올라 이 시를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고운은 물소리를 들으며 속세의 시시비비 소리 귀에 닿을까가 걱정되어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감싸 버렸다고 하는군요. 왜? 속세의 연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자꾸 바깥 속세의 소리에 귀를 쫑긋거려서? 아니면 속세를 잊고자 하나, 계속 고운을 쫓아오는 속세의 소리를 굳게 차단하고 싶어서? 하여튼 가야산은 흐르는 물로 온 산을 감싸버렸습니다.

 

 

고운은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 외국인을 상대로 실시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여 당나라에서 관직 생활도 하였습니다. 당시 당나라도 말기적 증세를 보이며 황소의 난도 일어났는데, 고운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문장을 떨치지 않았습니까? 전하는 이야기에는 황소가 고운의 글을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나요? 그러나 당나라에서 외국인이 출세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 고운은 17년 동안의 당나라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합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고운은 당나라에서 갈고닦은 실력을 신라에서 떨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골품제 사회에서 6두품인 고운이 올라갈 수 있는 자리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고운은 진성여왕에게 신라를 개혁할 수 있는 시무책도 올렸지만, 귀족들이 반발하자 관직을 내던지고 방랑길을 떠납니다. 틀림없이 귀족들은 6두품이 주제넘게 무슨 시무책이냐며 반발했을 것 같습니다.

 

고운은 온 나라를 유랑하면서 곳곳에 발자취를 남깁니다. 부산 해운대에도 고운이 남겼다는 ‘海雲臺’ 글씨가 지금도 바닷가 바위에 남아있습니다. ‘해운’은 최치원의 또 다른 호입니다. 이렇게 천하를 주유하던 고운은 말년에 가야산에 은거하면서 위 시를 쓴 것입니다.

 

고운이 말년에 가야산에 은거했다지만, 그가 언제 어떻게 가야산에 은거하다 죽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운은 죽지 않고 그대로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옵니다. 하여튼 고운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다니다가 말년에 가야산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는 알고 있었지만, 시를 통하여 가야산에서 노니는 고운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