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임세혁 교수]
2012년 10월 6일 자 빌보드 차트 순위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2위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8년 정도가 지난 2020년 9월 5일 방탄소년단의 <Dynamite>가 빌보드 순위에서 1위를 기록하였다. 우리랑은 다른 세계라고 생각했던 미국의 빌보드는 이제 한국 음악 시장의 가시권에 들어오게 되었고 김치와 태권도만이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과거와 달리 K-POP이라는 우리의 대중음악으로 외국에 우리를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임세혁의 K-POP 서곡’은 아무것도 없는 맨땅 위에 치열하게 음악의 탑을 쌓아서 오늘에 이르게 만든 음악 선학들의 이야기다. |
대학시절 미국에서 유학할 때 작곡 전공이라 편곡 수업을 필수로 수강해야 했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록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시작한 터라 모든 편곡 과제를 록 음악으로 했는데 하루는 담당 교수님이 부르시더니 과제의 수준이 나쁘지는 않지만 조금 더 자신만의 느낌을 주는 게 어떤가 하면서 “너의 소리는 너무 미국스럽다.”라는 얘기를 하셨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내가 추구하고자 했던 음악은 영국과 미국의 록 음악이었고 당시의 나는 어떻게 하면 그 소리를 정확하게 똑같이 구현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게 왜 문제인지 이해를 못 하는 나를 보며 교수님은 나에게 한국의 음악을 섞어보면 어떠냐고 얘기를 하셨는데 나는 거기에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는 국악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거문고와 가야금은 줄 개수로 구분하는 거고 단소는 부는 게 아니라 학교에서 친구들과 장난칠 때 휘두르는 용도로 사용했던 나에게 국악은 미지의 세계 그 자체였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한국인이지만 한국의 전통 음악을 모릅니다.”
내가 담당 교수님이었다면 “모르는 게 자랑이냐?”라는 느낌으로 받아쳤겠지만, 당시에 교수님이 나에게 받아친 질문은 결이 달랐다. 굉장히 원초적인데 그 부분에서 나는 두 번째로 말문이 막혔다.
“배우면 되잖아? 너는 지금 대중음악을 여기서 배우고 있잖아. 그거랑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은데? 물론 네가 좀 더 바빠지긴 하겠지만...”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실 그 얘기를 들었을 당시에는 그렇게 와 닿지가 않았던 얘기였다.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교수님은 얘기했다.
“음악이라는 건 단순히 화성과 음계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그 문화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값어치와 철학에서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아. 사실 그런 건 타 문화권 사람들이 흉내는 낼 수 있지만 정확하게 표현하기란 어려운 법이야. 예를 들어서 미국 학생이 한국의 전통 음악을 10년 동안 공부한다고 해도 네가 마음먹고 공부를 하면 미국 학생의 10년을 3개월 안에 따라잡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핏줄에 흐르는 혼과 음악은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물론 너는 자신의 음악을 훌륭하게 풀어 나가고 있지만 자신만의 색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한국 문화권 전통 음악을 접목 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문제의식은 우리나라의 여러 음악가들이 상당히 진지하게 생각했던 주제였다. 한국적인 포크 음악의 거장 송창식은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AFKN 미군 방송을 보다가 흑인들이 나온 미국의 아마추어 블루스 경연대회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내가 백날 해봐야 블루스 음악에서는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속이 상해서 펑펑 울었다. 그래서 정말 나에게 있는 음악을, 한국 사람의 배짱에 맞는 음악을 심각하게 찾기 시작했다.”라고 술회했다. 송창식의 독보적인 음악세계는 그러한 고뇌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당시 교수님이 내게 말씀하신 것처럼 국악을 제대로 공부하여 자신의 음악세계와 접목한 음악가가 있다. 작은 거인, 김수철이다.
김수철은 이렇다고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음악가다. ‘한국의 지미 헨드릭스’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무대 위에서 화려한 기타 연주를 보여준 불세출의 기타리스트이며 <일곱빛깔 무지개> 같은 록음악과 <모두 다 사랑하리> 같은 발라드, <내일> 같은 트로트풍의 음악을 만든 작곡가이기도 하다. <나도야 간다>, <젊은 그대>, <정신 차려> 같은 히트곡을 부른 가수이며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촉’으로 유명한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와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으로 시작하는 KBS 로고송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한국 대중음악 처음으로 혼자서 작사 작곡에 모든 악기를 연주하고 자신이 노래한 ‘원맨밴드’의 음반을 냈으며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1988 서울 올림픽, 2002 한일월드컵 등 굵직한 국제적 행사의 음악을 담당한 음악가다.
항상 그의 음악은 멈춰있지 않았고 계속되는 실험과 공부를 통해 발전하였다. 그러한 흐름의 정점에 있는 것이 김수철이 시도한 국악의 현대화였다. 사실 그 전에 대중음악과 국악과의 접목이 시도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곡의 악기 편성에 국악기를 한두 개 넣거나 곡 중간에 사물놀이를 넣는 정도여서 사실상 접목이라고 부르기에는 어정쩡한 경우가 많았고 지속해서 자신의 음악 색깔로 삼기보다는 하나의 이벤트성으로 소모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김수철은 그러지 않았다.
2008년에 음악 평론가 성우진과 가진 대담에서 그는 활동 초창기인 밴드 ‘작은거인’ 때부터 국악을 공부하면서 시도하다가 겉핥기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사사 등을 받으며 정식으로 공부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 <황천길>, <불림소리>, <팔만대장경> 그리고 국제 행사에 자주 나오게 된 <기타 산조>다.
특히 <기타 산조>는 김수철이 만든 장르로 기타라는 악기와 국악기 그리고 산조라는 음악의 특성을 모두 잘 이해하고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결과물로 김수철이 얼마나 국악의 현대화에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성우진과의 대담에서 김수철의 발언에 따르면 기타 산조는 일반 대중들이 다가가기 쉽게 하려고 실제로 만들어 놓은 것의 일부만 나온 것이라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하게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하였다.
일반적으로 진입 장벽이 높지 않게 김수철의 국악 세계를 접하고 싶은 분들께 권해드리는 음반은 영화 <서편제>의 음악이다.
1993년 나온 임권택 감독의 흥행작 가운데 하나자 한국 처음으로 서울 공식 관객 숫자 100만을 넘긴 영화인 <서편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섬진강 서쪽 지방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한국적인 미를 잘 살린 작품으로 회자하고 있는 명작이다. 이 영화에서 ‘진도 아리랑’, ‘춘향가’ 등의 판소리와 함께 작품 전반에 걸쳐서 흐르는 김수철의 음악은 임권택이라는 감독이 스크린에 그린 영화라는 그림에 화룡점정을 찍어주고 있다.
특히 <서편제>의 영화음악 가운데 다양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배경 음악으로 사용된 <소리길>이나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인 ‘한’을 표현하는 듯한 대금 연주가 인상적인 <천년학>을 들어보시기를 권한다.
김수철의 인생사에서 국악은 사실 소위 말하는 ‘돈이 되는 음악’은 아니었다. 그는 여러 매체와의 대담에서 국악 음반으로 80년대 후반에 억대의 빚을 졌고 아이러니하게 <정신 차려> 같은 대중적 노래를 불러서 그 빚을 갚았다고 술회했다. 일반적으로는 당시 아파트 몇 채의 금액인 억대 빚을 졌다가 털었으면 두 번 다시 쳐다보지도 않을 법도 한데 부채가 해결된 뒤 나온 김수철의 음반은 국악 음반 <불림소리>였다.
집착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집요하게 국악에 혼을 쏟아붓는 그에게 사람들은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만 돌아가는 ‘기인’이라 칭했지만, 그는 국악은 우리에게 자존심이자 긍지라는 대답을 했다.
그의 나이가 60대 후반으로 이제 칠순이 머지않은 나이이지만, 그의 음악은 멈추지 않고 있다. 작년에는 동서양의 악기를 합친 ‘100인조 동서양 오케스트라’ 공연을 진행했으며 앞으로 클래식 장르도 도전해 보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는 국악을 우리의 자존심이자 긍지라고 얘기했지만 나는 김수철이라는 이름이 그가 만든 곡의 제목인 <천년학>처럼 고고한 한국 음악의 자존심이자 긍지라고 생각한다. 멈추지 않는 시도와 발전으로 우리의 음악이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는 그의 행보에 다시 한번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
임세혁
송곡대학교 K-POP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