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조 임금의 정치에서 특히 세종 때 기록을 보면 ‘반복사지’의 표현이 눈에 띈다.
첫째 이런 ‘반복사지’의 표현이 쓰인 사건은 그 일을 신중히 처리했다는 증거다. 곧 어떤 사건을 독단으로나, 반대를 무릅쓰고 억지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둘째 모든 면에서 대화 곧 사맛의 논리[메커니즘] 속에서 문제를 풀려고 했다는 증거다. 의사소통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법칙을 준수하려 했다.
셋째 세종은 가능하면 벌하기보다 용서하고, 사람을 안고 가는 융화(融和)의 정치를 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곧 융화는 상대를 이해하고 다독이며 포용하고 가려는 정신이다. 관리들은 자기 업무에 충실한 나머지 남의 비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상소를 올리는 것이 임무이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임금이 이런 상황을 잘 아우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는가? 여부인데 여기서 세종의 포용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작 맞닥뜨리는 일이란 범죄 유무, 민생과 직결되는 답험손실법(토지개혁법의 하나)에 관련된 문제, 세자의 남면(南面, 대리청정) 문제, 불교의 폐단, 저화(楮貨, 닥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돈) 사용문제 등 당시 정치 현안으로서는 변화나 변혁(變革)과 관계되는 신중한 토론을 요하는 과제들이었고 이를 신하나 임금이나 다 같이 숙고하여 처리했다.
‘反復思之’는 ⟪조선실록⟫에 모두 129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세종 때 51건이다. 이는 어떤 과제를 신중히 처리한 것인지 아니면 실록의 기록 표현상 ‘신중히 처리했다’라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그 답을 실록 기사 세종 조에서 찾아보자.
(성균 생원 이영산 등이 불교의 폐단에 상소하다.) 이영산 등 6백 48명이 상소하기를, "신 등은 태평 시대를 만나, 성균관에 몸을 의탁하여 성학(聖學. 유학)에 마음을 두면서 이단(異端)의 설에도 대강 일찍이 섭렵하였습니다. 무릇 불씨(佛氏)의 해는 진실로 한 가지만이 아닙니다. 또 금군 보졸(禁軍步卒)로 하여금 흥천사의 문을 엄히 지키고, 좌우에 벌려 서서 사람의 출입을 금하여 그 깊고 굳음이 구중(九重) 궁궐보다 더하오매, 비록 대간의 기강(紀綱)으로도 이르지 못하오니, 저들이 장차 불의(不義)를 마음대로 행하여 꺼리는 바가 없을지라도 누가 금할 수 있겠습니까. 되풀이해 생각하건대(反復思之), 비록 신 등의 어리석음으로도 오히려 참을 수 없거늘, 하물며 성상의 마음이겠습니까. 이들은 일하지 아니하고 놀고먹으며, 세금을 피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좀먹으니, 이를 도태시킨 뒤에야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세종실록⟫21/4/18)
조선은 건국정신을 유교에 두었다. 그간 나타난 불교의 개인적 위로와 국가에 대한 봉사보다 불교가 가져오는 개인의 사치와 사회적 낭비를 보고 이를 바로 잡으려 한 것이다. 이런 불교에 대한 사헌부 상소가 또 올라왔다.
(감찰이 부처에게 절하는 일의 정지하길 청하는 사헌부 상소)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정신을 가다듬어 힘써 정치를 도모하시매, 이에 30여 년이 되었사온데, 이번 6월 20일의 전하의 명에, ‘승려가 비를 빌 때에는 감찰이 법식에 의하여 부처에게 절하도록 하신 것’을 엎드려 뵈오매, 신들이 잠자는 일과 먹는 일이 불안하여 통분함을 이길 수 없사옵기로, 반복하여 생각하여도 그 가한 것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이제 감찰로 하여금 손을 모아 부처에게 절하여 굳이 예(禮)아닌 예를 행하게 한다면, ‘예를 맡은 대간의 신하로서 오히려 부처에게 예를 한다.’ 하여, 다투어 서로 귀의(歸依)하는 자가 끝이 없어서, 사설이 날로 성하고 정도가 날로 사라져서, 말류(末流)의 폐단이 말할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 빨리 이 명령을 거두시고 다만 전과같이 하게 하시면 심히 다행하겠나이다." 하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세종실록⟫31/6/22)
유교 이념에 의해 세워진 조선은 전 왕조인 고려가 불교의 폐단으로 인해 쇠퇴하였음을 경계하며 억불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천년 넘게 이어져 온 불교 신앙은 민간이나 왕실 내에서도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못했다. 세종은 때에 따라 억불 정책을 펼치면서도 왕실 내의 불사를 직접 주관하였다.
재위 후반에 아들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잇따라 요절하면서,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절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어 소헌왕후마저 승하하자 세종은 세자와 대군들을 이끌고 불교 사원을 찾아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었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이에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며 불사를 중단할 것을 청하였다. 이러한 숭불 정책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궁궐 내에 법당을 조성하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천년의 민족 심리학적인 정신, 그리고 개인의 사상 곧 마음을 국가나 제3자가 통제하는 데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 사회 내에서는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세종은 후반부에 심신이 피로하여 업무를 세자에게 일부 넘기려고 하게 된다. 시기적으로 보면 세종 25년인데 이해 12월에는 훈민정음을 발표한다. 민족 과업인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위한 시간과 노력, 준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다. 이에 앞서 세종은 4월에 지시문을 승지에게 보여 앞으로는 세 차례의 큰 조회, 초하루 16일 조회만 직접 참가하고 나머지 날은 세자가 처결한다고 하였다.
(의정부와 육조가 세자가 남면하여 조회를 받는 것에 대한 부당함을 아뢰다) 의정부와 육조가 아뢰기를, "상감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옛날에는 나의 병과 같았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예가 없었다.’라고 하셨는데, 신 등은 ... 지금 이 법을 한번 시행한다면 후인들은 이 일을 구실로 삼을 것이매, 그 폐단은 장차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되풀이하여 생각하였으나(予亦反復思之) 진실로 사리(事理)에 방해됨이 없었다. 더군다나 중국에서도 벌써부터 시행하고 있잖으냐."
다시 아뢰기를, "태종 황제께서 정신이 혼매(昏昧)하고 말씀도 잘 못하여 할 수 없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의 병환은 그렇지는 않으면서 갑자기 이 법을 시행한다고 하시는데, ...."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 사람이 어찌 우리나라 사람만 못하여 짐작만으로 이런 법을 시행하였겠는가. (⟪세종실록⟫25/4/19)
세종이 몸이 아프고, 훈민정음 마지막 정리도 필요하고 세종은 내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이어 시중의 화폐 문제도 등장한다.
집현전 직제학(守集賢殿直提學) 이계전(李季甸)이 상서(上書)하기를, "근일에 저화(楮貨)를 행하는 것의 편부(便否)를 물으셨사온데, 신이 반복하여 생각해 보니, 갑자기 고치고 갑자기 행할 것이 아닙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기를, ‘돈[錢]이 떨어지면 저폐(楮幣)를 만드는데, 저폐가 실상은 병통이 된다. 하물며 위조(僞造)가 날마다 늘어나니, 저폐가 폐단이 없기를 바라나 되지 않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한 가지 말을 보면 저화(楮貨)가 끝내 폐단이 없지 못할 것을 단정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전에 진달한 바, ‘그대로 저화로 써도 뒤에 장차 폐단이 없을 것이라.’ 한 것은 특별히 사리(事理)를 미루어 말할 것이요, 예전 문헌을 자세히 상고하여 장차 폐단이 있을 것을 알면서 억지로 한 말은 아닙니다. (⟪세종실록⟫27/11/21)
세종은 동전을 보급하려고 했으나 백성들은 물물교환에 익숙해 있었고 결정적인 것은 흉년이 들거나 할 때 화폐는 현물에 견줘 가ᇝ어치의 등락이 심하게 나타났음이다. 물품의 부족, 값어치의 등락 등 불안 요인이 많아 조선에서 동전이 자리를 잡은 것은 이후 250여 년이 더 지난 뒤이다.
세종은 조금이라도 어렵다고 느끼는 일은 <반복사지>를 통하여 신중히 토론하고 그 결과는 단호히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