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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와 미스 최,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다

무심거사의 중편소설 <열 번 찍어도> 35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어찌 된 일인지 약속 시간이 삼십 분이나 지나도록 아가씨가 나타나지 않는다. 궁금하여 공중전화를 걸어보았다. 아가씨가 받는데, 어젯밤에 술을 너무 많이 먹어 못 일어나고 있었단다. 기다릴 테니 천천히 준비하고 나오라고 말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다시 삼십 분 이상이 지나서 미스 최가 나타났다. 얼굴이 푸석푸석하고 피곤한 모습이다.

 

사실 술집아가씨들이 술을 즐겨서 먹지는 않을 것이다. 직업이니까 할 수 없이 마시는 것이리라. 그런데도 짓궂은 손님들은 자꾸 술을 먹여서 젊은 여자가 해롱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일종의 가학성 술 먹이기라고 할까? 어제는 단골이 아닌 웬 뜨내기손님이 왔는데, 폭탄주를 5잔이나 돌려서 고생했단다.

 

김 교수는 평소에 마시는 커피 대신 미스 최에게는 생강차를 시키고 자신은 구기자차를 시켰다.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을 보니 생강차는 숙취 해소에 좋다고 쓰여 있고, 구기자차는 시력이 좋아진다고 쓰여 있다. 김 교수는 사십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마음은 항상 젊다고 큰소리치지만, 육체가 노화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이 인생 아닌가? 나이가 들어가자 몇 가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첫째는 시력이 떨어지는 현상이다. 노안이 오는지 안경을 썼는데도 가물가물해서 신문을 읽을 때 멀리 떼면 겨우 보이는 것이다. 둘째는 기억력이 떨어진다. 머리에서는 뱅뱅 도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 셋째는 말이 헛나가는 경우가 있다. 뻔히 아는 단어가 잘못 발음되는 경우가 있어서 아내가 바로 잡아 주는 현상이 나타난다. 넷째는 잘 넘어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멀쩡하게 길을 가다가 발이 접히면서 넘어지려고 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다섯째는 밥을 먹을 때에 자신도 모르게 흘리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여섯째는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누는데 그만 구두 위에 떨어지는 경우가 생기는 현상이다. 일곱째는 아내와 밤에 사랑을 나누려고 하는데 마음만 안타깝고 몸이 따라주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 친구들과 이야기해 보니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며 대개 비슷한 현상을 호소한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있나요?’라는 노래 가사가 절실히 가슴에 와닿는 나이들이 된 것이다.

 

차를 마시면서 김 교수는 평소와는 달리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아가씨도 평상시에는 조잘조잘 이야기를 잘했는데 어젯밤 술이 아직 덜 깨어서인지 조용히 차만 마시고 있다.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함께 있으면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법이다. 꼭 이야기해서 즐거운 시간을 만들려고 할 필요는 없다. 서로 좋아하면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즐겁다. 아가씨는 김 교수가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 교수는 홀짝홀짝 차만 마시고 있다.

 

더 참지 못하고 아가씨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빠.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지요?”

“으음. 《아리랑》은 어디까지 갔나? 재미있지?”

“아이, 오빠. 《아리랑》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해 보세요.”

 

김 교수는 가방에서 웬 신문광고를 꺼내어 주었다. 방통대학의 모집공고였다. 신입생은 1월 16일 마감이고 편입생은 1월 25일 마감이었다. 아가씨가 방통대 국문과 2학년 중퇴인 것을 알고 있던 김 교수가 전날 신문에서 방통대 모집공고를 보고 오려온 것이다. 김 교수는 아가씨에게 방통대에 다시 편입하여 공부하고 졸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방통대는 방송으로 강의가 진행되니까 녹음했다가 들으면 되고, 방학 때에 출석 수업을 하면 되기 때문에 술집에 나가더라도 가능하다는 이야기. 김 교수는 자기가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덧붙였다.

 

아가씨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김 교수는 아직 열흘 이상 시간이 있으니 잘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네가 다시 방통대를 다녀서 졸업장을 받는다면, 그것이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물론 그것이 어려운 일이겠지만, 나는 네가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당찬 여자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아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뜸을 들이더니 아가씨가 말했다.

“오빠, 정말 순진한가 봐. 키스해 주고 싶네요.”

“까불지 말고 내 말을 들어라. 네가 언제까지 술 마시면서 돈을 벌 수 있겠니? 언젠가 이런 직업을 청산하고 음식점을 차리든지 카페를 하든지, 너도 정상적인 직업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니? 너도 잘 알잖아. 어제 네가 원해서 술을 그렇게 폭음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오빠, 저는 싫어요. 그 전에 공부해 보니 지겹고 힘들어서 싫어요. 저도 잘 알아요. 사실 제 나이로는 이 동네에서 아가씨로서는 값이 떨어지지요. 올해 목표는 저도 마담이 되는 일이에요. 그런데 마담이 누구나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자기 자본이 있어야 마담도 될 수 있다고요. 계획대로 잘 되면 올 연말에는 마담이 될 거예요.”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김 교수는 다른 이야기를 좀 하다가 출근시켜 주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가 따라 나오면서 팔짱을 끼었다. 누가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다정한 연인이라고 생각할까? 연인이라고 보아주기에는 김 교수의 나이가 너무 들어 보이지 않을까? 그러면 부적절한 관계라고 볼까? 아니면 딸과 아버지의 관계라고 볼까? 정답은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다”라는 것이리라.

 

사람들이 시골보다 도시를 좋아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도시에서는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시골에 살면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서로 뻔히 알고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두가 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누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고 또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기 때문에 고독하지 않을 것 같지만, 오히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듯이 서울 같은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가장 고독한 사람들이다. 아파트의 같은 층에 사는 사람들도 서로 인사도 없이 모르고 지내지 않는가? 그러니 호텔을 나서는 젊은 아가씨와 중년의 사내를 누가 쳐다나 볼 것인가?

 

서울의 인구가 1,000만이 넘는데 김 교수가 다니는 교회 교인의 수가 1,000명이라면 이 호텔에서 교인을 만날 확률은 만분의 1이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올 확률이 만분의 1이라면 비가 오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도박에서 이길 확률이 만분의 1이라면 이기지 못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 교수가 근무하는 학교의 학생 수가 만 명이라고 하더라도 서울에 사는 학생 수는 1,000명이나 될까? 서울 인구가 1,000만 명이니 호텔에서 자기 학교 학생을 만날 확률 역시 만분의 1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어느 학생, 어느 교인이 잠실의 호텔에 올 일이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나쁜 짓(?)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은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에게 매우 편리한 도시, 어떻게 보면 매력 있는 대도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