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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 수련, 이등박문의 제사를 지내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3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누가 모르는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처단했음을.

그러나 누가 아는가?

대한제국 정부가 이토 히로부미 친족에게 위로금으로 10만 환을 보냈다는 것,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죽인 것이 너무 죄송하다며 얼빠진 동포들이 ‘사죄회’를 조직했다는 것.

어떤 ‘앙실방실한’ 무당은 삼년상을 치르겠다며 자신의 집을 전당 잡혀 돈을 빌렸다는 것.

 

‘앙실방실’ 요망한 무당의 이름은 ‘수련’이다. 1910년 3월 10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수련이 보인다. 지금의 우리말로 옮긴다.

 

무당 요물 수련이는 이등박문의 영정을 굉장하게 벌여놓고 삼년상을 지낸다고 경시청에 청원한 후 어제부터 시작하여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모신다니 그 효성이 끔찍하다.

 

 

수련은 ‘봉신회(奉神會)’라는 걸 조직하여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열기도 했다. 600여 명의 조선인 추모객이 모였다 한다.

 

수련이는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해서일까? 아니다. 오직 권력을 얻기 위해서다. 당시 권력은 일본인에게 있었으므로 그 환심을 사서 권력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수련에는 그보다 몇 년 전에는 시해당한 명성왕후에 빙의하여 고종 앞에서 굿판을 벌였다. 그때는 고종임금에게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고종이 권력이었고 지금은 일본인 총독이 권력이다. 제나라 임금이건, 일제 총독이건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권력 앞으로만 있을 뿐이다.

 

구한 말 많은 무당과 점쟁이들이 관료로 기용되었다. 우리는 최소한 16명의 이름을 알고 있다: 강홍대, 성광호, 김대진, 장환기, 최병주, 정환덕…….

 

망국의 전조였다.

 

이준(‘이준 열사’의 그 ‘이준’이다)과 그 동지들이 소매를 떨치고 분연히 일어났다. 벼슬자리를 꿰찬 16명의 무당과 점쟁이에다등과 함께 계향, 수련이라는 두 명의 요망한 무당을 합쳐 도합 18명을 처형해 달라고 상소한 것이다. 당국은 국정 농단을 일삼는 무당. 점쟁이에게 벌을 주는 대신에 이준과 그 동지를 투옥시킨다.

 

어떤 무뢰배가 무당을 이용하여 법무대신과 고등재판소 재판장 자리에 똬리를 틀었다면 그 나라가 망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그 무당은 ‘진령군’이고 그 무뢰배의 이름은 ‘이유인’인데 그들이 권력을 농락하게 된 자초지종은 이러하다.

 

임오군란시 민비(명성황후)가 충주로 피신했을 때 한 여자 무당이 찾아왔다. 그 무당에게 환궁할 날을 점쳐 보라고 하니 맞추었다. 민비는 그를 데리고 환궁했다. 무당에 홀린 중전은 그의 말이라면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무당은 드디어 자신을 관우의 딸이라면서 마땅히 사당을 세워 받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중전은 그대로 믿었고 무당을 ‘진령군(眞靈君)’에 봉해 주었다. 임금과 중전으로부터 상으로 받은 금은보화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의 길흉화복이 그 여자의 말 한마디에 달렸다. 벼슬아치들이 다투어 무당에게 아부하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무당을 누이라고 부르고 심지어 그 아들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 무당에 줄을 대면 안 되는 일이 없었다. 그야말로 만사무통(萬事巫通)이었다.

 

이유인(李裕寅)은 김해 사람이다. 그는 미천한 출신의 무뢰배로 한양으로 흘러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진령군이 권력을 잡고 있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굴렸다. 그는 사람을 시켜 진령군의 귀에 “이유인이라는 자가 있는데 귀신을 부리고 능히 비바람도 일으킬 수 있다”라는 말이 들어가게 하였다. 진령군이 임금과 중전에게 아뢰니 이유인을 들어 오라 하였다. 그 뒤 1년 이 지나지 않아 그는 양주의 수령이 되었다. 그의 아우는 김해의 수령이 되었다.

 

망국 전야는 가히 무당과 점쟁이의 전성시대였다.

 

 

일찍이 연암 박지원(1737-1805)과 그의 손자 박규수(1807-1877)는 무속사회를 이렇게 꿰뚫었으니, 적이 놀랍다.

 

연암 박지원 왈  “…(무당이) 겉으로는 귀신을 쫓는 척하나 남몰래 귀신을 불러들여 머리를 조아리고 귀신을 부르고 그에게 복종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재앙을 불러들이는 것이오…… 남의 병을 가지고 농락하면서 재물을 삼키려 드니, 어찌 병자가 떨치고 일어날 수 있겠소?”

 

환재 박규수 왈  “…(요마/妖魔, 요망하고 간사스러운 마귀가) 때때로 세상에 나타나 백성들의 재앙이 된다오. 그때 요사스런 무당 박수가 장구치고 춤추면서 의기상통하는 무리들을 불러내니, 줄줄이 함께 몰려든다오. 좋은 술잔에 향기로운 술로 그 미각을 즐겁게 하고 빗자루질과 방울 소리로 귀를 즐겁게 하면서 천하의 귀신들을 한 몸에 모이게 하지요. 그리하여 귀신을 머리에 이기도 하고 발로 밟기도 하고 등에 업기도 하고 껴안기도 하고 귀신의 말을 모방하기도 하고 귀신의 웃음을 웃으며 귀신의 관을 쓰고 귀신의 옷을 입고서는 자나 깨나 모든 행동이 한결같이 귀신의 부림을 받는 것이오."

 

이유인의 말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 다음으로 이어진다.

 

참고한 책:

* 이승원, 《저잣거리의 목소리들》

* 황 현, 《매천야록》

* 김명호, 《환재 박규수 연구》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김선흥 작가

전직 외교관(외무고시 14회), 《1402강리도》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