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보훈병원 뜰의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몇 안 남은 잎새가 펄럭이던 날, 오희옥 지사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병원 생활 6년 8개월 동안, 봄이 여섯 번 지나고 여름과 가을도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건장한 사람도 병상 생활이 오래되면 몸과 정신이 나약해지게 마련인데 지사님은 병상에서 미소를 잃지 않으시고 강한 정신력으로 버텨내셨습니다.
언제나 문병차 찾아오는 이들이 내민 손을 꼭 잡아 주시던 그 살가움과 따사로운 온기는 지금도 식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왼손에 편마비가 와서 불편한 상태지만 오른손에 펜만 쥐여 드리면 “힘내라 대한민국”, “다시 찾은 조국광복” 등 독립운동 하던 때의 소원을 흰 종이에 꾹꾹 눌러써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봄이 되면 집에 돌아가리라”라던 꿈 하나로 6년 8개월을 버티시던 지사님은 끝내 정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병상에서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힘드셨지만 삶의 말년을 보낸 서울중앙보훈병원은 지사님의 두 번째 보금자리였습니다. 친절한 의료진의 진료와 간호사님들의 보살핌에 이어 1남 2녀 자녀들의 극진한 사랑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일한 생존 여성독립운동가’를 뵙기 위해 병문안을 와 주신 수많은 분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병상에서 외롭지 않도록 찾아 주셨던 한 분 한 분을 지사님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찾아와 기타를 치면서 지사님을 위문해 주던 학교도서관문화운동네트워크(‘학도넷’ 대표 김경숙) 회원들, 여러 해 동안 학생들의 위문편지를 들고 찾아온 용인시 기흥구 성지고등학교 강연수 선생님과 학생들, ‘조선침략을 반성하는 모임’인 일본 도쿄 고려박물관 회원으로 특별히 오희옥 지사 병문안을 위해 방한했던 마츠자키 에미코(松崎恵美子) 씨, 지루한 병원 생활을 달래드리고자 가수 나미애 선생 등이 부른 영상음악을 제작하여 한걸음에 달려온 KBS 사내 동아리 ‘KBS사회봉사단’ 이정호 단장과 회원들... 돌아보면 지사님 주변에는 언제나 따스한 마음씨를 가진 분들로 넘쳐났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사님의 훌륭한 인품 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입원 중 다소 기력을 되찾으셨을 때는 병원 1층 갤러리로 자주 나와 전시물들을 둘러보시고 더욱이 2023년 6월에는 손수 쓰신 서예 작품을 <보훈가족서예전>에 출품하시는 열의를 보이셨지요. 지사님은 78살 때부터 서예를 시작하셨으므로 햇수로는 20년 가까이 되는 실력으로 평소 안중근 의사의 어록을 즐겨 쓰시곤 했습니다.
山不高而秀麗[산불고이수려] 산은 높지 않으나 빼어나게 아름다우며
地不廣而平坦[지불광이평탄] 땅은 넓지 않으나 평탄하구나.
水不深而淸淸[수불심이청청] 물은 깊지 않으나 맑고 깨끗하며
林不大而茂盛[임불대이무성] 숲은 크지 않으나 풍성하고 무성하네.
- 안중근 ‘금수강산(錦繡江山)’
일제의 침략으로 수려한 금수강산 고국땅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독립운동가 부모님을 따라 먼 이국땅 만주에서 태어나 망국노(지사님은 중국땅을 전전할 때 중국 아이들이 망국노라고 놀리던 것이 가슴 아팠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신세로 떠돌이 생활을 하던 때에도 지사님은 꿋꿋하게 조국광복을 위해 찬란한 청춘기를 광복군으로 뛰셨습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반기는 이 없는 해방된 조국에서 겪어야 했던 6.25 한국전쟁과 분단의 비극,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6~80년대를 거치고 나서 비로소 지사님은 수원의 13평짜리 보훈 복지 아파트에서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 아파트가 다시 떠오릅니다. 수원 대추골의 작은 아파트 정원 은행나무 아래 그늘에서 저를 기다리시던 모습이 오늘 새삼 그립습니다.
“류후공원 낡은 로프웨이에 매달려 산마루를 올랐다. 저만치 발아래 류저우 시내가 육십 년대 사진첩 속 그림처럼 어리고, 그 어딘가 열네 살 소녀의 씩씩한 군가가 들려올 듯하다. 용인 느리재의 명포수 할아버지 의병장으로 나선 길 뒤이어, 만주벌을 쩌렁쩌렁 호령하던 장군 아버지, 그 아버지와 나란히 한 열혈 여자 광복군 어머니, 그 어머니의 꽃다운 두 딸 희영 희옥 자매, 자매는 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 되어 항일연극 포스터 붙이러 어봉산 도락암 공원에도 다녀갔을까? 열네 살 해맑던 독립 소녀 팔순 되어 사는 집, 수원 대추골 열세 평 복지 아파트 찾아가던 날, 웃자란 아파트 정원 은행나무 그늘에 앉아 낯선 나그네 반겨 맞이하던 애국지사, 흑백 사진첩 속 서간도 황량한 땅 개척하며 독립 의지 불사르던 오씨 집안 3대 만주벌 무용담 자랑도 하련마는, 손사래 절레절레 치는 수줍은 여든여섯 소녀, 그 누구 있어 치열한 3대의 독립운동사를 책으로 쓸까? 욕심 없이 아버지 유품을 내보이며 들꽃처럼 미소 짓던 해맑은 영혼, 그 눈동자에 비치던 우수 어린 한 점 이슬, 아직도 광복의 영광 새기지 않는 조국, 전설 같은 독립의 이야기 찬란히 다시 꽃피울 때, 꿈 많던 용인의 열네 살 광복군 소녀의 서간도 이야기 만천하에 들꽃처럼 피어나리라.”
- 이윤옥 ‘용인의 딸 열네 살 광복군 소녀 ‘오희옥’ (2009)
그랬습니다. 대추가 많이 나던 수원의 대추골 조원동(棗園洞)에서 여성독립운동가 광복군 소녀 오희옥 지사는 그렇게 살고 계셨습니다. 우리 사회가 (여성) 독립운동가를 찾지 않고, 기억하지 않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지사님은 부지런히 3.1절과 8.15 광복절, 11.17일 순국선열의 날 등 ‘독립과 관련 있는 기념식’은 물론 여러 행사에 몸을 사리지 않고 직접 뛰어다니시며 자라나는 후손들의 ‘독립 정신 함양’에 열과 성을 다하셨습니다. 그러다가 6년 전 (2018) 3월 17일(토), 급성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뒤로 긴 투병 끝에 지난 (2024)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에 그만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지난 6년 8개월 동안 지사님은 한시도 지치지 않고 재활 의지를 보이시며, 꿋꿋한 광복군 출신답게 투병생활을 이어오셨던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올해부터 애국지사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른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지사님의 장례 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지막 가시는 길이 절대 쓸쓸하지 않으셨을 것이란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국화꽃으로 단장한 영결식장으로 예복을 갖춰 입은 군인들의 호의를 받으며 들어서는 영정을 바라다보며 저는 지사님께서 살짝 미소 짓고 계심을 느꼈습니다.
그 어떤 험난한 속에서도 절대 굴하지 않고 “일본놈들을 쳐부수기 위해 뛰었노라”라고 하시던 말씀이 영결식 내내 귓전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렇게 지사님은 우리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사님을 떠나보내지 않았습니다. 지사님은 언제나 틈만 나면 “힘내라 대한민국”을 외치셨습니다. 일제에 침탈당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청춘을 불살랐던 지사님, 병든 몸으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신 지사님의 독립정신은 영원히 우리들 가슴에서 가슴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지사님! 부디, 지친 육신을 내려놓으시고 하늘나라에서 다시 뵙는 날까지 평안한 삶을 누리소서!
사랑합니다. 오희옥 애국지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