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눈 내리는 밤 숲 가에 멈춰 섰다
이게 누구의 동네인지 나는 알 것도 같다.
그는 모를 것이다. 내가 여기 멈춰 서서
눈 덮인 그 동네를 보고 있는 것을.
내 조랑말은 농가 하나 안 보이는 곳에
일년 중 가장 어두운 밤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이렇게 멈춰 서 있는 걸 이상히 여길 것이다.
무슨 착오라도 일으킨 게 아니냐는 듯
말은 흰 입김을 내뿜으며 주인의 결정을 기다린다.
그르릉 하는 엔진 소리 외에는 솔솔 부는 바람과
솜처럼 부드럽게 눈 내리는 소리뿐......
내가 좋아하는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패러디해서 시 한 수 베껴보았다. 조랑말(pony)이란 표현을 자동차로 대치하면 그게 어느 눈 내리는 겨울 저녁 날 나의 추억이다. 이 시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나의 자동차다. 그것을 몰고 밤길을 가다가 문득 차를 세우고 건너편 산자락과 마을을 보며 흰 눈에 덮이는 경치를 감상한 것인데 그때가 다시 생각이 난 것은 이제 이 자동차와 이별했기 때문이다.
12년 반 동안 쓰던 자동차다. 한 미국 자동차 판매사가 2012년 말 연말 할인행사에 맞춰 생각보다 저렴하게 차를 팔기에, 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자동차를 많이 사주는데 나도 미국차 한대 쯤 팔아주면 좋지 않겠는가...하는 마음에서 산 차. 3,500cc니까 준대형이고 이런 차를 몬다는 것이 어떤지도 모르고 값도 괜찮아서 선택한 것인데 그러고서 햇수로 12년 넘게 같이 있다가 드디어 내 품에서 내보낸 것이다.
겨우 2만 7천 킬로를 조금 넘었다. 주행거리가 12년 동안 그것밖에 안 되었으니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실 것이다. 대충 보면 1년에 2천5백 킬로, 한 달에 200킬로를 뛰었을 뿐이다. 마침 퇴직 때 산 것이어서 장이나 보러 가고는 대부분 주차장에 세워두었다는 말이다. 이 정도 주행거리면 사실상 새 차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난해 말 집에 온 미국 사는 처제가 차를 타보더니 새차 냄새가 아직도 난다고 했다. 그런 차를 왜 내보냈는가?
첫째는 오래된 차를 자주 사용하지 않으니까, 배터리가 자주 방전이 되어, 차를 쓰고 싶을 때 제대로 쓰기가 어려웠다. 한두 번 방전되다 보니 배터리를 새로 교환해도 금방 다시 방전되어 그때마다 충전요청을 해서 서비스를 받아야 했다. 그것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둘째는 이제 나이가 들면서 시력이 안 좋아져 밝은 데서 어두운 데로 들어갈 때 명암조절이 안 되니 시야가 잘 보이지 않는 현상이 생겼다. 그리고 또 시력뿐 아니라 인지능력이 떨어져 상황 파악이 금방금방 되지 않으니 자칫 사고의 위험도 커졌다.
셋째는 차가 크니 주차할 때마다 여간 힘들지가 않다. 운전 실력도 미숙하니 더욱 그렇다. 나이 드신 부모님이 계시는 곳을 차로 찾아갈 때 1시간 반 이상 달려야 하는데 그때 졸리고 피곤해 사고 위험이 늘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더 이상 차를 운용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어, 제법 고민을 하다가 해가 바뀐 차에 불쑥 결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서울에 대중교통망이 너무 잘 되어있어서 차 없어도 그리 큰 불편이 없을 것이라는 점도 작용한 것 같다.
그래서 나름 고민을 한 뒤 차를 보낸 것인데, 그래도 10여 년을 함께 하던 자동차가 아닌가? 막상 보내고 나니 홀가분하게 되었고, 갑자기 일이 닥칠 때 차 없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보다도 오히려 이 자동차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싫든 좋든 이 자동차는 나의 발(足)이자 나의 말(馬)이었다. 옛사람들이 멀리 갈때 꼭 말을 타듯이 나도 어디 대중교통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가면서 이 차를 애용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이 차도 나의 애마였다.
내 자동차는 엔진이 크고 힘이 좋아 많은 사람이 아주 잘 나가는 차라고 칭찬하던 것이었는데 그런 차를 대부분 주차장에 박아 놓음으로서 자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미안한 것이다. 그동안 이 차는 주차장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 혹시나 주인이 자기를 도로에 올려놓아 줄 것인가를 초조하게 가다렸을 것인가? 그럴 때 혹 이렇게 원망도 했을 것 아닌가?
"아 나도 자동차로 태어난 이상 누구처럼 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 아닌가? 고속도로에 올라서면 진동도 별반 없이 힘차게 잘 달릴 수 있는데, 우리 주인은 나를 주인의 말로 등록하고서는 합당한 대우도 안 하고 이렇게 구박했을까?
중국 춘추시대에 명마(名馬)를 알아보는 백락(伯樂)이라는 사람은 좋은 말을 알아보고 이를 잘 대우해 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했다는데 우리 주인은 뛰어난 능력과 뛰고 싶은 마음을 가진 명마라고 할 나를 몰라주는가? 그리고 주인은 늘 자기 민족이 기마민족의 후예라는 말을 하며 저 멀리 초원을 달리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그처럼 잘 달리 수 있는 나를 주차장에 처박아 놓았다가 10년이 더 지나 낯선 사람에게 둔마(鈍馬)처럼 팔려 가게 하는가?"
그런 소리를 들어도 해명이나 변명할 말이 없다네. 자네에 대해서는 유구무언이야. 굳이 말하자면 같이 다닌 게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초창기에는 멀리 창녕으로 내려가시는 부모님을 모시고 한 번에 800킬로미터쯤 뛴 적도 있고 가족들과 함께 동해안을 한 바퀴 돈 적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멀리사는 아들들 집으로 가며 오며 손주들 재롱도 본 것도 있고. 꽃 피는 봄, 북한산 주위를 돌고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을 찾고 가을엔 온갖 단풍을 다 볼 수 있었지. 그리고 자네는 주인인 내가 너무 무심하게 대했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내가 주차하거나 어디 멀리 가며 졸리거나 할 때도 한 마디도 원망의 말을 한 적이 없다네.
옛날 황희 정승이 젊을 때 밭에서 농부가 소 두 마리를 써서 일하는 것을 보고 누가 일 더 잘하느냐고 물었더니 농부가 황희 정승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두 소에 대한 평판을 이야기하기에 황희 정승이 누가 듣는다고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그 농부가 “아니 소들도 다 알아듣습니다. 그러면 기분 나빠하지요”하고 했다는데. 이 주인도 혹 자네가 기분이 나쁠까, 봐 한 번도 좋지 않은 말은 하지 않았다네. 그것이 나의 방식으로 자네를 아끼고 사랑한 마음이지.
그렇게 저렇게 10년 넘게 뛰는 동안 한 번도 사고를 내지 않고 잘 달려준 것이 정말로 그렇게 고마울 수 없지. 그리고 내가 우리 자동차를 많이 이용하지 않은 것은 말하자면 수십만 킬로미터를 뛰어 혹사한 것보다는 좋은 일이고 그만큼 공기도 덜 오염시켰고, 그리해서 우리 자동차가 건강한 모습으로 새 주인에게 갈 것이니 그동안 아쉬웠던 사랑은 새 주인에게서 받으면 될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주면 내가 덜 미안할 것일세.
이제 자네가 나에게는 마지막 동반자였고 말이라네. 앞으로 다른 자동차를 가지지 않고 자네와 같이 지낸 시간의 좋은 추억만을 기억할 것이네. 그리고 앞으로 자네가 더 잘 뛰라고 마음으로 빌어줄 것이네. 그러니 새 주인을 만나도 자네의 이름처럼 성실하고 우직하고 힘센 황소(Taurus)가 되어 잘 달려주게. 그렇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10여 년 같이한 인연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서로 간직하세. 그동안 고마웠어요. 어떤 상황에서건 사고를 내지 말고 건강하게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잘 지내시기를!
2025년 정월에 전 주인이 보냅니다.
사족) 자기가 쓰던 차 한 대 넘겼다는 것이 일반인들에게 무슨 뉴스가 된다고 이리 호들갑이냐고 하실지 모르겠다. 그런데 속뜻은 여러분들도 웬만하면 차를 팔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라는 권고를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정말 홀가분하고, 사고나 걱정 위험도 줄고, 마음도 편하다. 실제로 큰 마트에 시내버스를 타고 가서 장을 보고 왔는데 운동도 되고 기름값도 안 든다. 앞으로 자동차세라던가 보험료를 다 절약할 수 있지 않은가? 자동차 없어도 다 살게 되어있는 대한민국 서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