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요즘 '시그니처'라는 말을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영어단어 ‘signature’의 한글식 표기이다. 그 뜻은 일반적으로는 그 사람의 사인(sign), 혹은 서명(署名)을 뜻하는데 이 단어의 뜻이 넓어져 어떤 사람이나 현상을 대표하는, 그것만 보면 그게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란 해석이 함께 쓰인다.
그런데 최근 일본의 유명 식품회사에서 '시그니처 한식'이란 이름으로 봉지식품이 일본과 동남아 시장에 나왔다. '시그니처 한식'이라니,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한식, 혹은 가장 한국적인 음식이란 뜻을 담은 선전문구로 쓴 것 같다. 포장지의 전면에는 우리 한글로도 표기하고 있고 동남아에서 통용되는 한자표기는 아주 작게 쓰여 있어서 한국 식품인 것으로 오해할 정도다.

나온 식품은 세 종류다. 소고기 당면볶이, 치킨당면볶이, 트리플 치즈 당면볶이 이렇게 세 가지다. 그런데 이 제품을 만든 회사 이름이 ‘Nissin’이다. 일본을 좀 안다는 사람이 이 말을 듣더니 깜짝 놀란다. "아니 니신이 한국 이름으로 한국 맛 식품을 만들어 내놓았다고?"
이 사람이 놀란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닌 것이. 이 니신이라는 이름은 1958년에 처음으로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해 세계인들에게 간편 식사라는 혜택을 가져다준 일본인 안도 모모하쿠(安藤百福 1910~2007)가 창업해 이끌어온 식품회사(日淸食品)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에서 나오는 인스턴트 라면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식품 가운데 하나인데, 일본을 대표하는 라면기업이 한국식 라면제품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시그니처 한식'이라는 광고문구를 쓰고 있다. 아마도 요즘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K-푸드를 의식해 '한국음식의 맛을 대표하는 맛'이라고 선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거 참, 그동안 알게 모르게 일본에 컴플렉스가 있던 한국인들 가운데는 "봐라, 우리가 이렇게 성장했고, 너희들이 우리를 따라오는 것을 보니 참으로 우리가 자랑스럽고, 그걸 따라오려는 너희 일본이 안쓰럽지 않으냐?"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근래에 한국의 문화가 세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고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키워 온 한식의 맛이 새롭게 평가받고 있는 것은 확실히 자랑스러운 일인데, 다만 여기에 우리가 지나칠 수 있는 라면 개발의 역사가 두 나라에 숨어있다.
납
라면은 일본에서 개발된 음식이다. 원래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면 종류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밀가루를 뭉쳐 손으로 옆으로 잡아당겨 늘이는 방법을 주로 쓰는데 (이것을 ‘拉麵-납면’이라고 한다. ‘拉’이란 글자는 우리가 누구를 '납치'한다고 할 때 쓰는 글자여서 거기에서 보듯 잡아챈다는 뜻이고 그 중국 발음은 '라'이기에 '라면'이란 발음이 된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망명한 명나라 학자 주순수(朱舜水)가 당시 그를 지원해 주던 토쿠카와(德川) 막부의 2인자인 토쿠카와 미츠쿠니(德川光國)에게 손으로 잡아당겨 면을 만드는 중국 남방식 국수요리법을 알려주어 그것으로 요리를 만들어 먹은 것이 최초라고 한다.
그러다 1872년경 요코하마의 중국인 거리에 중화요리점이 생기면서 일본에서 일본화된 중국식 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해 정식으로 라면(일본식으로 라멘이라고 읽었다)이 음식으로 대량 판매되기 시작한다. 이때의 라면은 푹 고아낸 돼지고기 육수에 역시 잘 삶은 생면을 넣어 돼지고기 편육 등을 곁들이는 것이어서 조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1910년 태생인 일본인 안도 모모후쿠는 젊을 때 여러 가지 사업을 하다가 1957년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신용조합이 파산을 맞아 덜렁 셋방 하나만 남은 상태가 되어 무엇을 할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때 일본은 2차대전 뒤 경제가 어려워져 많은 일본인이 배를 곯다가 중국 식당가에서 긴 줄을 서서 기다리다 간신히 라면 한 그릇을 사 먹곤 했는데 이를 보고 이들이 싸게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미국의 원조 밀가루를 이용해 만들면 될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즉시 셋방 뒤켠에서 국수 개발에 들어갔지만, 실패를 거듭하다가 부인이 튀김요리를 만드는 것에 착안해서 면을 기름에 먼저 튀겨내어 건조한 뒤에 이를 다시 물에 끓이면 되는 간편한 '치칸 라멘'을 출시한다. 이로써 음식사에 인스턴트 라면시대가 열린 것이고 이때가 1958년 8월 25일이다.

같은 해 오사카에 출장을 왔던 전중윤이란 한국인 보험회사 사장은 일본인들이 라면을 뜨거운 물로 끓어 불과 5분 안에 싸게 편하게 먹는 것을 보고는 당시 먹을 것이 부족해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 우리나라에 라면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귀국한 뒤 자기도 라면개발에 들어간다.
그러나 도저히 그 방법을 알 수 없어 실패를 거듭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일본의 라면 회사들에게 제조법과 설비를 사겠다고 요청했다. 그런데 준비된 돈이 너무 적어 거절을 당하다가 자기 나라 국민에게 꼭 먹게 해주어야 한다는 전중윤의 간절한 설득에 감복한 묘죠(明星)식품의 오쿠이(奧井) 사장이 5분의 1 값으로 제조법과 수프 기술까지도 제공하여 한국에서는 1963년에 삼양식품이 처음 라면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서는 1958년, 한국에서는 1963년에 각각 간편 라면시대가 열렸고 일본 니신사의 안도 사장은 다시 1971년에 컵 형태로 라면용기를 새로 개발해 '컵 누들'이란 이름으로 컵라면 시대를 열어 오늘날처럼 전 세계인들이 간편하게 한 끼를 값싸게 해결하는 음식혁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일본이 개발하고 우리나라가 옆에서 배운 이 라면이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우리나라를 통해 전 세계를 휘어잡는다. 우리나라는 일본 라면의 구수한 맛을 넘어 매운 고추가루를 많이 쓰는 화끈한 수프를 만들어 그 맛이 우리 청년들을 먼저 매혹하고 있어서 전 세계에 한국 라면 붐을 일으킨 것이다.
우선 한국은 1인당 라면소비가 ‘세계 1위’다. 세계인스턴트라면협회가 지난해 한국ㆍ미국ㆍ일본ㆍ중국 등 15개 나라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우리 국민 한 사람은 1년에 약 74.1개의 라면을 먹어 세계에서 1인당 라면 소비량이 가장 많다”라고 밝혔졌다. 우리나라의 라면시장은 지난 5년간 40%씩 성장해 지난해 라면 총생산은 59만 톤으로 2조 124억 원어치다. 세계인들이 우리 라면을 점점 더 많이 사 먹는다는 이야기다.
매운 라면 비빔면, 당면 등의 연관제품으로 확산한 우리 식품들은 세계 시장에서 엄청나게 화제를 몰며 매출이 늘어나고 있다. 2008년 1억 3,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2억 1,000만 달러로 5년 사이 64%가 늘었다. 해마다 20%씩 수출이 늘어나고 있다. 가히 라면이 반도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최근 우리의 라면은 봉지라면, 컵라면에 이어 국물 없는 라면, 면을 굽거나 말려 만든 웰빙화 라면 등으로 확대되면서 한국의 매운맛 돌풍이 21세기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영국 마이크로 다큐멘터리 유튜브 채널 ‘위대한 이야기(Great Big Story)’가 말했듯이 “6·25 전쟁 이후 일본에서 도입한 미천한 국수 한 그릇이 뜻밖의 영웅으로 탄생해서 이 라면은 대학생부터 직장인까지 사회적 격차를 뛰어넘어 한국 문화의 필수품이 됐고, 오늘날 이 위대한 사회 통합 음식은 전 세계를 제패했다”라는 말 그대로다.

지난 60년의 라면발전사를 돌아보면서 이 기술을 일본의 한 기업인이 노심초사하면 간편한 면으로 개발한 공을 잊을 수 없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기술이 마침내는 인류의 허기진 배를 빨리 체워 주는 큰 공헌을 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기술을 이어받아 우리 한국인들의 음식조리법 통해 세계인들에게 다시 새로운 기쁨과 위안을 준 우리들의 노력도 인정을 받아야 할 것이다.
사실 올해가 수교 60돌이라는 시점이기에 일본과 우리의 교류사를 되돌아보게 되는데 일본이 개발하고 우리가 그것을 더욱 개량하고 발전시켜 세계에 공헌한 품목들이 이 라면만이 아니라 반도체가 그랬고 자동차가 그랬고 카라오케도 그랬다. 어쩌면 일본이란 이웃은 역사 속에서는 미운 역할을 했지만, 수교 이후에는 우리나라를 살찌우는 영양소를 많이 제공한 것을 다시 보게 된다.
미우나 고우나 일본은 노밸상을 수십 명이나 배출하면서 기술과 과학 개발을 해낸 나라다. 우리가 그 옆에서 그들의 것을 잘 보고 배우고 또 그를 이기려 노력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더 좋은 과학과 기술을 개발하는 단계다. 일본의 대표적 기업인 니신식품이 한국산 입맛을 내세워 새로운 제품을 낸 것은 지난해 11월이다. 곧 이제 일본은 우리 제품을 보고 그것을 따라 하거나 더 개발한다. 그들의 노력도 예전 우리가 일본의 라면을 더 발전시켰듯이 우리의 입맛과 식품을 더 좋게 세계에 내놓을 수 있다. 이제 우리와 일본은 그렇게 새 시대를 위해 함께 나아가는 때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