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네(吾家無寶物) /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네(寶物惟淸白)” 이 시는 조선 전기 문신 김계행(金係行, 1431~1521)의 시로 그는 죽기 직전 자손들에게 “대대로 청백한 삶을 살고 돈독한 우애와 독실한 효심을 유지하도록 하라. 세상의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마라.”라고 당부했습니다. 17살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과거 급제에 연연하거나 관직에 나가려고 초조해하지 않았던 탓에 51살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이후 사헌부 감찰로 시작하여 홍문관 부제학,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냈는데, 이러한 관직생활은 무려 17년의 긴 세월 동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까닭은 정책의 잘못을 보면 소신과 학문을 바탕으로 조리 있게 비판하였고 조금도 시류나 인기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때문이었지요.
외척의 전횡이나 대신의 부정부패, 제도적인 병폐에 대해서는 더욱 단호한 모습을 잊지 않았는데 그러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 말년에는 3차례나 국문을 당하며, 생사의 기로에 설 정도였지요. 그러나 그의 인격을 흠모하던 사람들의 적극적인 변호에 겨우 목숨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는 동료와 죽음을 함께하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했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 김계행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