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한다면 조선민중과 함께 살리라
-일본인 변호사 후세다츠지의 삶-
“부산발 경성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들이 무조건 조선인을 하대(下待)하는 것을 보았다. 기차가 지나가는 역 주변에 있는 근사한 조선가옥은 정말 조선인들을 위한 가옥일까? 경성에 2,3층으로 양옥집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과연 그것들이 조선인의 삶과 관계가 있을까?” 1923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新人의 朝鮮印象>에서 일본인 변호사 후세다츠지(布施辰治;1890-1953)는 그렇게 조선의 인상을 쓰고 있다. 그 무렵 한다하는 일본인들의 조선방문기에는 경치가 좋으니 평양기생이 예쁘다느니 하고 변죽을 울리는데 반해 후세 변호사의 조선 첫인상은 다르다. 경성행 열차 안에서 까닭 없이 조선인을 얕잡아 보던 일본인을 목격하면서 그는 식민지 지배국 사람들의 거친 횡포를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내가 후세다츠지를 만난 것은 이십 여 년 전 도쿄 진보쵸의 헌 책방에서였다. <어느 변호사의 생애, 후세다츠지, 이와나미출판, 1963>라는 한 권의 일본어판 책을 읽은 이후 나는 ‘나쁜 일본인’ 중에 ‘좋은 일본인’도 있음을 알았고 이후 조선옷을 입고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하다 조선의 흙이 된 아사카와다쿠미도 알게 되었다. 후세변호사는 말한다. “조선 땅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농업의 개선과 발전으로 질적, 양적으로 향상되더라도 그것이 모두 식민지 본국으로 유출된다면, 조선 무산계급 농민의 생활은 조금도 향상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기름진 쌀과 보리 같은 생산물이 자신들의 배를 채우지 못하고 전부 유출되는 것을 보고 슬픔과 애달픔만이 늘어갈 것이다. 더욱이 수출된 쌀이 돈이 되어 조선 무산계급 농민에게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 까닭은 일본인 대지주의 소작지이기 때문이다.”
그가 조선을 보는 눈은 정확하다. 지금도 입만 열면 일제가 조선의 농업생산성을 높여주었다고 하는 일본인 학자들이나 그를 신봉하는 앵무새 한국인 학자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후세 변호사라고 하면 2·8독립선언 때 `조선 청소년 독립단' 사건을 변호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밖에도 후세 변호사의 한국사랑은 각별하다. 그는 ‘박열 부부의 일본왕 암살 미수사건(1923년), 1920년대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 단원 체포사건(1923년),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의 `일본왕 시해 미수사건'(1924년) 등의 한국관련 재판에 적극적으로 변론을 맡았고,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1924년)에 대한 일본 당국의 태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3·1운동 때는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글을 발표하였으며 1923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해 의열단원 김시현(金始顯)의 조선총독부 요인암살 기도사건, 제1·2차 조선공산당사건 등의 무료 변론을 맡았다. 이로 인해 1930년대에만 3회에 걸쳐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두 번이나 투옥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한결같이 조선사랑의 끈을 놓지 않은 인정 많고 의로운 일본인 변호사였다.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이윤옥(59yo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