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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10. 가곡이야기 4. “삭대엽의 순 우리말은 <자진한잎>이다.”

 

 
 

가곡이야기 4. “삭대엽의 순 우리말은 <자진한잎>이다.”


《대악후보》나 1580년대의《금합자보》에 실려있는 만대엽이 가곡의 원형임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러한 만대엽은 늦어도 17세기 후반까지는 화려하게 각광을 받았던 것이 확실하지만 그 이후로는 점차 중대엽에게 자리를 내 주기 시작하는 모습이 여기저기에 보이고 있다. 1680년대에 제작된《신증가령》이라는 악보에는 중대엽이나 삭대엽이 각각 1, 2. 3으로 확대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18세기 초엽부터는 만대엽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가 하면 위세를 떨치던 중대엽 역시 평조의 음계를 잃는 등, 점차 그 기세가 꺽이기 시작하면서 가곡의 중심은 가장 빠른 템포의 삭대엽으로 옮겨지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삭대엽(數大葉)이란 무슨 뜻일까?
삭(數)은 자주 혹은 잦게(빠르게)라는 의미이다. 수로 읽기도 하나 그럴 경우에는 세다의 의미가 된다. 대(大)는 크다는 뜻으로 옛날에는 ‘한’으로 읽었다. 대전(大田)을 ‘한밭’이라고 했던 것처럼 크다는 뜻을 우리말로는 ‘한’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엽(葉)은 잎이나 갈래 등의 뜻을 지닌 글자이기 때문에 음악용어로는 ‘악곡’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잦게 부르는 큰 곡” 곧 <자진한잎>(잦은한잎)이다.

삭대엽, 곧 자진한잎은 18세기 이후 많은 파생곡들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예부터 삭대엽의 첫 번째 변화형 이름을 초수대엽(初數大葉)이라 불러왔다. 물론 글자의 의미로는 <초 수대엽>이 아니라 <초 삭대엽>이 맞는다. ‘삭’이나 ‘수’의 한자(數)가 동일하기 때문에 ‘삭’을 ‘수’로 잘못 읽어 온 것이 아니라, 삭대엽의 첫치라는 의미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초삭대엽’이라는 발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많은 가객이 ‘초수대엽’이라고 불러온 것이다.

독자 여러분도 초삭대엽과 초수대엽을 발음해 보시면 전자보다 후자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이름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같은 원리로 두 번째 삭대엽은 이수대엽, 세 번째는 삼수대엽이라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삭대엽의 제1곡이므로 초삭대엽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한자어에서 유래한 이름들은 글자 그대로 읽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아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한자로 <五六月과 十月>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글자 그대로 ‘오육월’이나 ‘십월’이라고 읽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뉴월’이어야 하고 ‘시월’이라고 불러야 한다.

국립국악원에서는 과거로부터 ‘초삭대엽’ ‘이삭대엽’ ‘삼삭대엽’으로 발음하는 것이 불편하여 ‘초수대엽’ ‘이수대엽’ ‘삼수대엽’ 혹은 이를 더 줄여서 ‘초수’‘이수’ ‘삼수’라고 불러온 것이다. 이분들이 글자를 모르거나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그렇게 불러온 것이 아니질 않는가, 수백 년 동안 전통적으로 써 왔던 악곡의 명칭을 근래에 와서 불편한 이름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이해하기 어렵다. 앞으로도 이 난에서는 초수대엽이나 이수대엽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하여튼 현행의 가곡은 초수대엽에서 시작하여 이수대엽-중거-평거-두거-삼수대엽-소용이 등으로 부른다. 이 곡들이 바로 대엽조의 악곡들이다. 이처럼 여러 악곡으로 파생이 되었고 그 뒤로 농(弄)의 곡조나, 낙(樂)의 곡조, 그리고 빠른 박자의 편(編)의 곡조들이 첨가되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여성창자들과 함께 여창 가곡이 출현하게 된다. 19세기 중반의 《가곡원류》에 이르면 거의 오늘날과 같은 남녀창 가곡의 한바탕이 완성되어 전문가의 노래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가곡은 박자가 느리고 그 표현에서도 즉흥성을 배제한 채,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격식을 차려야 하는 노래이다. 자유분방하면서도 강한 표출력을 지닌 민요나 판소리에 견주어, 자생력을 잃고 현대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재미없는 노래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가곡은 그 긴 세월을 오히려 더욱 강하게 버텨 온 것이다. 어떤 미적(美的) 요소들이 가곡 속에 담겨 있어서 그 생명력을 유지해 온 것일까?


    
         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