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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일본 이야기 100회를 맞이하면서(2)

  
지난주에 이어 일본이야기는 100회 특집으로 51회부터 99회까지 중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이야기를 소개하기로 한다.


<51회>
때는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20분. 강제징용에서 풀려나 부산항으로 가는 4,730톤급 해군특무함대 ‘우키시마호 (浮島丸)’를 타고 꿈에도 그리던 고향땅을 밟기 직전 일본의 잔악한 귀국선 폭파로 수많은 조선인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마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승선자 7,000여 명 중 4,000여 명이 교토 마이즈루항 앞바다에 수장 된 지 올해로 65년(2010년)을 맞이한다. 사건 발생 1주일 만에 우키시마호의 도리우미 함장은 사건전모를 발표하고 조선인 3,735명 중 524명과 일본인 25명을 합해 총 54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하였으나 승선장부가 없는 상황에서 일본측의 이런 숫자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애초에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고 진로변경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①음료수를 실으려고 ②패전 후 해군의 사기저하로 부산항까지의 운항 거부 등을 들고 있으며, 폭발 원인은 미군의 기뢰를 건드렸기 때문 등으로 발표하였으나 선박 인양이 되고 난 후부터 의도적으로 폭발시켰다는 의혹설이 제기된 가운데 1965년 박경식 씨의 <조선인 강제연행>과 재일동포 작가인 김찬정 씨의 <우키시마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았다>등이 발표되면서 이 문제가 전면으로 드러나게 되었으나 아직도 이 문제는 완전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52회>    
“흰 목련꽃 나무 아래 / 나란히 누워 잠든 그대들 누구인가! / 고향땅 어머니 곁 떠나 / 어이타 황천길 들었는가! / 오다케 할머니는 힘주어 들려주셨지 / 목련꽃 나무 뿌리 밑에 조선인 시신6구가 뒤엉켜 있더라 / 그때 / 매미는 고래고래 악을 썼고 / 목련꽃 나무 옆 주택가 하늘은 흐려있었지 / 꽃은 지고 또 피고 또 피고 또 지고... / 뉘 집 귀한 아들이었을까? / 학살된 젊은 조선인을 그리며 관음사로 돌아오는 길 / 팔월 무더위는 끝내 / 속적삼을 적시었지”     - 이윤옥 ‘치바현 나기하라 조선인 학살 현장의 오다케 할머니’ -

치바현 나기하라의 흰 목련 나무 밑에는 조선인이 학살되어 묻혀있다. 당시 일본의 만행을 목격했던 오다케 할머니는 현장을 방문한 우리에게 그 만행을 낱낱이 이야기해주었다.

<60회>
99살 먹은 할머니가 시를 써서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 한 수를 감상하자.

私ね 人から                나는 말이에요 사람들이
やさしさを貰ったら       친절히 대해줄 때마다
心に貯金をしておくの    마음 속에 저금해 두고 있어요

さびしくなった時は       외로울 때는
それを引き出して          그것들을 꺼내
元氣になる                   힘을 내지요

あなたも 今から          당신도 지금부터
積んでおきなさい          저금해 봐요
年金より                      연금보다
いいわよ                      나을 테니까요   <貯金(저금) >

<95회>
1945년 1월 동경의 한 병실을 두 달째 끈질기게 드나드는 조선인이 있었다. 서예가 손재형 씨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66살의 후지츠카(藤塚隣, 1879-1948) 씨로 일제강점기 때 조선 경성제국대학 교수 출신 추사 연구가이다. 손재형 씨가 병실을 드나든 것은 다름 아닌 김정희의 ‘세한도’를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어째서 세한도는 동경의 한 병실에 누워 있는 후지츠카 손에 들어간 것일까? 국보 180호인 세한도의 운명이 일각에 놓였던 그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양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한도를 받아 낸 3개월 뒤 후지츠카의 조선 보물창고는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거의 불타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