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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때 세도가 한명회의 6촌형이며 조선 전기 문신인 한계희(韓繼禧)는 그 누구보다도 청렴한 선비였습니다. 대대로 덕을 쌓았고 얼마든지 부유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나라에서 받는 봉록을 친척 가운데 부모 없는 사람이나 홀어미가 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근근이 살았지요. 또 집안이 가난하여 아침저녁을 나물에다 검소한 음식으로 지냈는데 그도 과분하다 하여 양과 횟수를 줄였습니다.
어느 날 한명회의 집에서 문중 모임을 할 때 한계희의 가난함에 이야기가 미치자 모두 공론 끝에 동대문 밖 고암(鼓岩) 밑에 있는 논 열섬지기를 주기로 했지요. 이에 한계희가 사양하자 한명회와 이를 주선한 사람들이 소리를 모아 호소하며 자리를 뜨지 않음에 어쩔 수 없이 논을 받았습니다. 대신 한계희는 그 논에서 거둔 곡식을 절대 집 담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고암 둘레에 사는 어려운 집, 가장이 병든 집에 골고루 나눠주었지요. 이를 기리는 뜻에서 고암이란 이름은 편안할 안 자로 바꿔 안암(安岩)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조선 전기 문신 김정국(金正國)이 말한 청빈관을 들어보면 “없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책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개 하나, 환기할 창 하나, 햇볕 쬐일 마루 하나, 차 다릴 화로 하나,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하나, 봄 경치를 찾아다닐 만한 나귀 한 마리면 족하다.” 고 했습니다. 요즘 끝없는 욕심에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많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의 청빈함을 따라 소박하게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고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