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사형을 기다리는 아들 백범에게 허드렛일로 얻은 밥을 나르던 겨레의 어머니 곽낙원 애국지사 |
비탈진 언덕길 인천 형무소 터엔 지금 찜질방 들어서 사람들 웃음꽃 피우며 여가 즐기지만 예전 이곳은 백범 어른 잡혀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곳 국모 살해범 츠치다를 처단한 사형수 아들 위해 고향 해주 떠나 남의 집 식모살이로 밥 얻어 감옥 드나들며 아들 옥바라지 하신 어머니 삼남 지방으로 쫓기는 아들 마곡사서 머리 깎고 중 된다고 소식 끊었을 때 애간장 타셨을 어머니 인과 신 어린 손자 두고 먼 이국땅서 눈 감은 며느리 대신하여 빈 젖 물리며 길러 내신 어머니 상해 뒷골목 배추 시래기 주어 애국청년 배 채우고 광복 위해 뛰는 동포 뒷바라지로 평생 등이 굽은 겨레의 어머니 오늘도 허리띠 질끈 동여매고 오른손에 밥사발 든 어머니 겨레에게 건네는 말 나지막이 들려온다 너희가 통일을 이루었느냐! 너희가 진정 나라를 되찾았느냐!
곽낙원(郭樂園, 1859.2.26~1939.4.26) 곽낙원 여사는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선생의 어머니이다. 인천시 남동구 인천대공원 안에는 백범 김구 선생과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 서 있다. 오른손엔 밥그릇이 들려있고 허리띠로 질끈 동여맨 치맛자락의 곽 여사 동상은 한눈에 봐도 걸인 같은 모습이다. 백범은 광복 후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자신의 옥바라지를 위해 인천으로 거처를 옮기고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며 먹을 것을 얻어다 주신 모습을 평생 잊지 못했다. 일제에 의해 일어난 국모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복수로 일본인 츠치다(土田讓亮)를 죽인 백범은 재판을 받기 위해 인천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이때 어머니 곽낙원과 아버지 김순영은 황해도 해주의 가산을 정리하고 자식의 옥바라지를 위해 함께 인천항으로 넘어왔다. 이후 감옥을 밥 먹듯이 드나들던 아들 백범의 옥바라지는 물론 어린 손자 둘을 남겨놓고 일찍 세상을 뜬 며느리를 대신하여 빈 젖을 물리며 어린 손자를 키워냈다. 그뿐만 아니라 곽 여사는 반평생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고락을 같이한 ‘임시정부의 어머니’이다. 아들 동지들이 돈을 모아 생일상을 차려주려 하자 손수 맛있는 것을 지어 먹겠다고 돈을 받아 그 돈으로 권총을 사서 일본 놈을 죽이라며 청년단에게 건네준 이야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찡하게 한다. 평생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1939년 4월 26일 망명지인 중국 중경에서 80살로 생을 마감한 곽 여사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에 옷깃을 여며야 할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더보기> 곽 여사 아들 백범 찾아 삼만 리 백범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경무국장 직에 있을 때 부인 최준례 여사와 아들 인(仁)을 1920년 8월 상해로 불렀다. 2년 뒤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상해로 모시어 1년간 모처럼 백범 가족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나 임시정부 살림살이가 극도로 나빠져 청사 집세가 밀리기 시작하고 임시정부 요인들 식사 조달이 어려워지자 곽 여사는 시장에 나가 배추 껍질을 주워 다가 임시정부 요인을 뒷바라지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다고 며느리 최준례 여사가 차남 신(信)을 낳고는 산후조리 중에 숨을 거두자 어린 두 손자를 떠안게 되는 운명에 처했다. 극빈의 임시정부 시절 아들 백범이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곽 여사는 두 손자를 데리고 귀국 길에 오른다. 귀국의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어린 두 손자가 영양실조로 죽게 될 지경인지라 구걸해 먹어도 고향이 낫다고 판단 한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의 살림살이가 얼마나 어려웠나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대목이다. 귀국은 했지만 아들 백범이 일제경찰에 감시를 받는 인물이라 어머니 곽 여사도 거주이전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정도 손자들이 크자 백범이 있는 중국으로 가고자 황해도 안악경찰서에 출국허가를 내보지만 경성의 총독부 경무국에서 이를 즉시 저지시켜 중국으로 가는 길이 원천 봉쇄되고 만다. 그러나 현명한 곽 여사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일제경찰을 따돌리기 위해 둘째 손자의 병 치료를 위해 신천으로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집을 떠난다. 살림살이를 그대로 놔두고 떠난 곽 여사가 설마 중국으로 가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곽 여사의 위장전술이었다. 그때 큰 손자 김인은 평양숭실학교 3학년이었는데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던 손자를 몸만 빠져나오게 하여 함께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 이때 곽 여사 나이 76살이고 큰 손자는 18살, 작은 손자는 13살이었다. 이들의 중국탈출 코스는 철도로 평양을 거쳐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넌 뒤 중국 단동에서 철도로 대련으로 가서 선편으로 상해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검문검색이 심해 무사히 중국 땅을 밟을 때까지 곽 여사와 손자는 가슴을 졸여야 했다. 곽 여사는 측면 지원해주는 동포와 1차 난관을 무사히 통과하면 ‘돈 송금했음’이라는 전보를 쳐서 마중 나올 사람과 은밀한 소통을 했는데 만일 일제 관헌에 잡히면 ‘돈 도착하지 않아 곤란함’으로 정하고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하여 상해행 승선까지 성공하게 되면 ‘돈 받았으니 안심할 것’이라는 전보문을 치기로 약속하고 중경에 있는 아들 백범을 찾아간다. 어린 손자 둘을 데리고 넓디넓은 중국 땅을 헤맸을 곽 여사의 모습은 한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입을 것, 먹을 것이 넉넉지 않은 시절에 교통편마저 여의치 않은데다가 아들 백범은 사상 유례 없는 당시 돈 60만 원(미국달러로 1,525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린 상태였으니 이들 가족의 운명이 어찌 풍전등화가 아니랴! 그래도 하늘은 이들을 도와 무사히 가흥에 도착하여 당시 남경에 있던 아들 백범은 가흥으로 달려와 어머니 곽 여사와 두 아들과 해후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 과정을 두고 신용하 교수는 “곽낙원 여사의 치밀하고 정확한 판단과 여걸다운 담대한 행동으로 일제의 철통같은 감시망을 뚫고 고향 탈출, 중국 망명에 성공했다.”라며 곽 여사의 침착하고 지혜로운 행동에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곽 여사 탈출 이후 일제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중심으로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이고 일제의 상해 총영사관, 천진 총영사관, 청도 영사관 등 산하 각 경찰서를 동원하여 곽 여사를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했음이 <조선통치사료> 제8권 (일본 동경 1971년 판)에 극비로 기록되어 있다. - <백범과 민족운동연구> 제2집, 2004. - ‘극비문서, 金九母子ノ脫出ニ關スル件, 1934.4, 조선총독부’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