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현 하기시(山口縣 萩市) 를 찾은 것은 죠카마치(城下町)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죠카마치란 일본국어사전에서 “전국시대로부터 에도시대에 걸쳐 다이묘(大名)의 거성(居城)을 중심으로 한 도시”라고 풀이하고 있지만 쉽게 말해서 오래된 일본 전통가옥을 구경 할 수 있어 고건축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죠카마치는 하기시 말고도 성주(城主)가 살던 곳은 어디에나 있으며 지금은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지방정부에서도 이들 고건축물을 복원하고 당시의 거리를 그대로 재현하는 등 관심이 많다.
무사 시절에는 북적였는지 모르겠지만 인구 5만의 하기시는 조용하다 못해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의 도시처럼 고요했다. 하기시내를 전망 할 수 있는 지월산 등산로에서 만난 노년의 아저씨는 천년고도 교토가 찾아드는 관광객으로 번잡해졌다면서 더 조용한 곳을 찾아 하기시로 이사 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전통 냄새가 물씬 풍기면서도 번잡스럽지 않은 곳이 하기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곳 전통가옥을 살피다가 뜻밖에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으니 그 이름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였다. 일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토기념관과 고택에 이르는 곳에는 이토의 밀랍인형이 있는가 하면 롱코트 차림의 전신 동상도 세워져 있다. 일본위키피디어에 따르면 이토를 소재로 한 영화가 10편, 텔레비전 드라마가 16편이요, 이등박문전집 전 36권을 비롯한 책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이토기념관에 써 붙인 이토의 해적이(연보)에는 호화로운 관직명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열하면서도 그가 조선청년 안중근에 의해 죽은 것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은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과 재판과정에서 자신을 한국 의병 참모중장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그는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며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거사동기를 밝혔는데 이처럼 이토는 한국인에게는 영원한 국권침탈자이다.
나는 이토기념관 안팎을 돌아보며 열혈청년 안중근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이내 에르윈(Erwin von Blz、1849-1913)이라는 29년을 일본에 체류한 독일 의사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이토의 죽음을 애석해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토는 한국인의 좋은 친구였다. 당시 부패한 한국을 올바로 개혁하여 일본 통치하에 두는 것이 한국인의 행복이라고 여겨 60세를 넘는 고령임에도 통감을 맡았다. (이하 생략)”
그러나 그는 이토가 열변한 다음과 같은 말을 알지 못했다. “비록 여기서 학문을 닦아 뜻을 이룬다 해도 자기의 나라가 멸망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たとえここで學問をして業が成っても、自分の生國が亡びては何の爲になるか) 라는 말 말이다.
물론 여기서 자기 나라의 멸망이란 서구열강에 도전받는 일본을 지칭하는 것이다. 일본의 멸망은 안 되고 조선의 멸망은 손톱만큼도 가슴 아파하지 않는 이토가 한국의 좋은 친구였다는 것은 대관절 무슨 망발인가! 어쭙잖은 일본인들은 에르윈의 말을 앵무새처럼 지껄이며 신뢰하고 찬양한다. 그러한 풍토는 아직도 하기시의 이토 밀랍인형처럼 썩지 않고 살아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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