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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와 나의 살을 에이는 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 그러나 이미 내 전택을 빼앗고 또다시 나의 처자를 해치려 하니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무릎 끊어 종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이런 추상같은 기개의 시를 남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대통령) 이상룡 선생은 1932년 7월 1일 만주 지린에서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을 추진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선생은 정통 유학자로 99 간이나 하는 넓은 집에 살았지만 스스로 노비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종들을 해방한 것은 물론 재산 모두를 털어 독립운동에 온몸을 던진 노블리스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대표적 인물로 꼽힙니다.
선생은 고향인 안동에서 유인식, 김동삼 등 혁신적 유림 인사들과 함께 근대교육기관을 세우고, 계몽활동에 힘을 쏟다가 계몽활동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50이 넘은 나이에 온 식구를 이끌고 만주로 넘어갑니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혹한의 황무지 땅에서 선생은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1919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에 본격적인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셨지요.
어제는 이상룡 선생 서거 80주기입니다. 결코, 조선인이 일본의 종이 될 수 없다는 불굴의 겨레사랑 정신을 실천하다 가신 이상룡 선생에 대한 정부와 언론의 관심이 없음에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그나마 일부 민족을 걱정하는 시민단체만이 잊지 않고 이상룡 선생을 추모하고 그 얼을 새기는 행사를 열어 위로가 될 뿐이지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당당한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데는 독립투쟁에 온몸을 던진 이상룡 선생을 포함한 수많은 독립투사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잊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