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위는 윤봉길 의사 (1908. 6. 21. ~ 1932. 12. 19.)가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쓴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라는 시의 일부분입니다. 오늘은 25살의 꽃다운 나이로 조국의 독립운동을 외치다 숨진 윤봉길 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떠난 날이지요. 19살 나이에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든 윤 의사는 고향인 충남 예산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을 통한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곧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각오의 글을 남기고 중국 망명의 길에 오릅니다.
그리고는 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조국독립을 위해 기꺼이 한 몸을 던지게 되지요.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맞아 축하식이 벌어지던 상해 홍구공원에서의 장렬한 의거는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고 할 만큼 대한민국의 독립의지와 기개를 세계만방에 드높인 의거였습니다. 의거 뒤 윤 의사는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꽃다운 25살의 청년 윤봉길 의사는 비록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조국은 영원토록 그를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오늘 윤 의사 서거 80주기를 맞아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