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빗=김슬옹 기자] 과연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반포식을 했을까? 훈민정음 반포는 우리 민족의 미래를 활짝 연 사건이기에 무척 거창하게 열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쉽다. 얼마나 즐거운 상상인가. 한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무척 설레는 상상 아닌가. 그러나 결론은 반포식을 안 열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 의견이다. 왜 그럴까.
첫째, 일단 반포식을 했다는 역사 기록이 그 어디에도 없다. 훈민정음 반포를 알린 기록은 두 가지다. 먼저 ≪조선왕조실록≫ 1446년 음력 9월 29일 기록에 “是月 訓民正音成(이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라고 나온다. 이때의 ≪훈민정음≫은 책 이름이다. 책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책이 완성되어 간행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9월 29일에 간행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기록은 달별 기록이기 때문이다.
▲ 세종대왕이 1446년에 훈민정음 반포식을 했다는 가정 아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가상으로 그린 그림
≪조선왕조실록≫은 사건이 일어난 날 그 사건을 그대로 기록하는 날별 기사와 한 달 간 일어난 사건을 모아 마지막 날 모아서 기록하는 달별 기사로 나뉜다. 물론 9월 29일 사건일수도 있지만 위 기록은 “이 달에”라고 하여 날별 기사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어 9월 29일 간행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면 9월 어느 날에 간행했을까. 그 기록은 바로 ≪훈민정음≫ 책 속에 나와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신하 쪽 집필 대표인 정인지가“ 正統十一年九月上澣.資憲大夫禮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春秋館事世子右賓客臣鄭麟趾拜手稽首謹書(정통 11년 9월 상한에 정인지 삼가 적다)”라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상한은 상순(上旬)이라고 하며 1일부터 10일까지를 가리키고, 중순(中旬)은 11~20일, 하순(下旬)은 21일~그믐(음력 그 달 마지막 날)까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상한’이라는 말 자체로는 정확한 날짜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간행 날짜의 범위는 열흘 이내(9.1~9.10)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셈이다. 남한의 한글날을 바로 이 날짜를 양력으로 바꿔 기념하는 것이다. 상한의 마지막 날인 9월 10일 기준으로 삼아 양력으로 바꾸니 10월 9일이 기념일이 되었다.
▲ 서울시가 한글날 기념으로 재현한 반포식 사진
반포식을 안 했다는 두 번째 근거는 그 당시 시대 분위기로는 거창한 반포식을 열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자가 매우 중요한 주류 문자였고 그 한자 권력의 중심인 중국과 사대부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반포를 거창하게 연다는 것은 한자 중심의 세계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거나 비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것이 어찌 주체적인 문화를 사랑한 영특한 왕이라 하더라도 쉬운 일이었겠는가?
세 번째 근거는 반포식은 일종의 잔치인데 잔치는 두루두루 주변 사람들의 동의를 구해야 가능한 행사로 그럴 수 없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훈민정음 반포는 집현전 소장학자들 중심으로 일부 학자들만이 동의를 한 상태이고 일부는 반대 분위기가 강했다. 이런 터에 반포식을 공개적으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행사 형식의 반포식은 안 했지만 훈민정음 문자 해설서 간행 자체가 반포의 의미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해설서 집필에 참여한 사람들은 훈민정음 반포가 얼마가 중요하고 거창한 일이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훈민정음 해설서 집필에 참여한 여덟 명의 신하들은 정인지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훈민정음은 인간이 사사로이 만들 수 있는 글자가 아니다. 훈민정음은 신이 내린 문자이며, 신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세종 성군만이 만들 수 있는 문자였다. _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말 재구성
** 김슬옹:
한글학회 연구위원, 세종대 겸임교수, 한글문화연대 운영위원
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