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의정부에 있는 ‘신숙주 선생묘’에 가면 1971년에 한글학회에서 세운 ‘문충공고령신숙주선생한글창제사적비’가 있다. 보한재 선생이 나신 554돌을 맞이하여 당시 한글학회 허웅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앞장서서 세운 사적비다. 신숙주는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에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학자요 관리였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 《운회 번역》,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직해동자습》 등 훈민정음 보급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모든 책에 그의 이름만이 빠짐없이 올라간 것만 보아도 그 업적을 가늠해 볼 수 있다(표1 참조). 그렇다면 한글 혜택을 누리는 후손으로서 세종의 뜻을 이어 남긴 그의 큰 한글 업적을 기려야 할 책무가 있다. 사실 한글창제사적비는 한글학회가 아니라 한글을 쓰는 남북한 온 겨레가 세워야 할 사적비였다. 그런데도 우리 후손들은 그의 업적을 제대로 모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가 세조 편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폄하하고 있다. 사육신, 생육신의 삶은 고결하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사육신이나 생육신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가 세조 편에 선 것을 단순한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서울시 종로구 내수동, 세종문화회관 뒤쪽에 있는 주시경 마당에서 가까운 곳에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이 세운 조선어학회 곧지금의 한글학회(회장 권재일, 이사장 김종택)가 있다. 조선어학회는 원래 3호선 안국역 근처에 있었는데 광복 뒤 이곳으로 이사 왔다. 원래는 허름한 집이었지만 조선어학회 33인 가운데 한 분이신 애산 이인 선생이 많은 돈을 기증하고 국민 모금과 정부 후원으로 1977년에 지금 건물을 지은 것이다. 학회 앞에는 주시경 선생의 가슴상과 이 학회의 정신을 잘 드러내는 얼말글 새김돌이 학회의 뿌리와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바로 한글학회는 어렵고 힘든 시기에 한글을 지키고 가꿔온 사람들이 세운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회이기도 하다. 1908년 8월 31일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이 지금의 연세대 옆 안산에 자리 잡고 있는 봉원사에 모여 우리 말글 연구를 통해 우리 말글을 지키고 가꾸자고 ‘국어연구학회(회장, 김정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한글학회의 뿌리다. 무려 100년이 넘은 가장 오래된 학회로 봉원사에 가면 그것을 기념하는 새김돌을 세워놓았다. 안타깝게도 주시경 선생은 1914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한글날은 2013년 공휴일로 지정된 뒤 그야말로 큰잔치로 자리 잡았다. 주요 행사가 열리는 광화문 광장은 하루종일 북새통을 이룬다. 서울뿐만 아니라 여주시, 세종시, 울산시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도 관련 행사가 꼬리를 문다. 2013년부터 이러한 한글날을 기리면서 온 국민이 한글날의 의미와 가치를 알게 하는 소책자(14.9*20.9cm)를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정책과에서 펴내 해마다 인기를 끌고 있다. 해마다 다른 방식으로 2016년까지 다음과 같이 네 번 펴냈다. 주요 특징과 더불어 필자가 대표 집필하게 된 배경을 밝혀 보고자 한다. 이 책자를 펴내기에는 이제는 고인이 된 김혜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정책과장이 한글을 위해 몸 바쳐 일한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 있어 고인을 기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 누구나 알아야 할 한글 이야기, 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2013). 10+9. 문화체육관광부. 66쪽. ◐ 누구나 알아야 할 한글 이야기, 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2014). 3+5(12단 접이형). 문화체육관광부. ◐ 누구나 알아야 할 한글 이야기(8단 접이형). 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2015), 문화체육관광부. ◐ 누구나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 역사의 상상 18세기 후기 정조(재위 1776~1800) 시절 박지원(1737~1805), 박제가(1750~1815), 정약용(1762~1836) 등 많은 실학자들이 세검정에서 회합을 갖고 몇 가지 조정에 건의할 강령을 채택하고 정조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정조의 개혁 정치가 더욱 힘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서인의 보수 정치에 주춤하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행동에 난선 것이다. 실학의 진정한 학문적 가치를 실천하기 위한 거대한 역사의 발걸음이었다. 일부 평민들도 동참했다. 상소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 중종 때 어숙권이 건의했다가 실패한 책방 설치를 전국 주요 도마다 최소 하나씩 설치한다. 둘. 지식과 정보를 쉬운 문자와 책으로 보급하고 나누고자 했던 세종 정신을 시대정신으로 삼는다. 셋. 한글을 주류 문자로 채택하고 단계적으로 실록도 한글로 적고 모든 공문서도 단계적으로 한글로 적는다. 넷. 공공 교육 기관에서 다루지 않은 한글 교육을 서당과 향교부터 단계적으로 정규 교과로 다룬다. 다섯. 한글 문학을 장려하고 기존 한문 문학을 한글로 번역한다. 정조도 익히 마음에 둔 정책들이라 이를 채택하기에 이른다. 책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위인들의 태몽은 위인전의 첫머리를 장식하곤 한다. 필자도 어렸을 때 위인전을 읽고 위인이 되고 싶은 마음에 태몽을 어머니께 여쭈었다가 기억이 안 난다는 어머니 말씀에 낙담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위인 중의 위인 세종의 태몽이 궁금했다. 이러 저리 찾아보니 여럿 기록들에 세종의 어머니인 민씨(훗날 원경왕후)가 햇무리 한가운데 세종이 앉아 있는 꿈을 꾸고 세종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더 조사해 보니 사실 이 꿈 이야기는 태몽이 아니라 세종이 네 살 때인 1400년 2차 왕자의 난 때 어머니 민씨가 꾼 꿈이었다. ▲ 이방원의 비 민씨(뒷날 원경왕후)가 꿈을 꾸니 햇무리가 있었고, 그 안에 막동(세종)이 앉아 있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세종은 조선왕조가 세워진 지 5년째 되던 1397년에 태어났지만 곧바로 정치 격랑의 회오리 속에서 자라난다. 두 살 때인 1398년에 아버지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 방번’ 두 이복동생과 정도전 쪽 사람들을 없애는 피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조는 물러나고 1398년에 정종이 즉위하고 1400년에 이방원이 친형인 이방간 파
[한국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전 세계에서 제나라 말과 글로 이름을 짓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식 한자는 분명 우리 것이지만 지금 국어기본법에서 정한 우리글은 아니다. 한자 없이는 언어생활을 할 수 없는 일본도 일본말을 중심으로 이름을 짓되 한자를 빌리는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예 한자 옥편에서 무슨 자 무슨 자 따다가 짓는다. 이런 방식을 비판하면 사람들은 내게 어이없다고 하거나 국수주의자라고 비판할 것이다. 그래서 한글 이름 짓기 혁명이라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주장하는 한글이름짓기는 기존의 순우리말로만 짓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국 지금 우리나라 이름짓기 방식은 한자 옥편에서 따다 짓는 방식과 순우리말로 짓는 한글이름 방식 두 가지가 있는 셈이다. 당연히 두 방식을 따르되 한자 옥편에서 따온 이름도 한글로만 표기하자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일상어로 짓거나 한자어, 고유어 가리지 말고 융합식으로도 짓되 한글로만 표기하자는 것이 한글 이름 혁명의 주요 내용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방식을 수용하여 이름짓기 방식을 다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분류] 어원과 글말 표기로 본 한국의 사람이름 짓기 분류 (1) 한
[한국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세계에서 문자 기념일을 갖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다만 남한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려 10월 9일을 한글날로, 북한은 창제한 날을 기념일로 삼아 1월 15일을 조선글날로 기리고 있다. 이렇게 남북의 한글 기념일이 다르다 보니 마치 분단의 상처처럼 보이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살릴 필요가 있다. 한글날은 10월 9일로 가되 창제일은 문자 기념일로 삼아 기린다면 여러 가지 유용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한글은 세종이 비밀 연구 끝에 1443년 음력 12월에 공표하고 그 뒤에 일부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을 받아 문자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반포하다 보니 창제한 날과 반포한 날이 확연히 다르게 되었고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되었다. 15세기는 음력을 사용하고 지금은 양력을 사용하니 날짜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포한 날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낸 날인데 세종실록에서 1446년 음력 9월에 훈민정음 책이 완성되었다고 했고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9월 상순에 완성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정확한 특정 날짜는 아니지만 세종실록 기록과 훈민정음 해례본 기록이 일치한다. 음
[한국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요즘도 피의자 강제 심문을 하는 것이 종종 문제가 되고 있는 걸 보면 피의자의 인권을 지켜나가는 일은 쉽지 않은 듯하다. 사실 인권 후진국이냐 아니냐의 척도는 피의자나 죄인을 다루는 제도나 실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이 죄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살피게 한 일은 지금 시각으로 봐도 매우 고귀한 것이었다. 심문 과정이나 죄를 기록하는 문자가 한자이어서 죄인의 인권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이 훈민정음 창제의 핵심 동기 가운데 하나이고 보면 세종의 인권 존중 자세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세종은 세종 14년인 1432년에 물리적인 힘으로 증거를 얻을 바에야 죄를 아예 주지 말라고 했다. 절대 억울한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해 11월 2일자 실록 기록에 따라 사건 내용을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세종이 좌대언 김종서(金宗瑞)에게 의금부에서 국문(중죄인의 심문)하는 김용길(金龍吉)김을부(金乙夫)매읍금(每邑金) 등의 죄상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김종서가 대답하기를 용길(龍吉)을부(乙夫) 등이 이르기를, 일찍이 밭을 갈러 가다가 문득 솥가마 따위의 물건이 숲 속에 있는 것을 보고 기뻐서 가지고 왔다.고 하였습니다마는, 그
[한국문화신문 = 김슬옹 교수] 최만리[?-1445]를 대표로 하는 집현전 일부 학사들의 집단 상소는 정확히 1444년 2월 20일(이하 음력)에 올려졌다. 훈민정음 창제가 1443년 12월(정확한 날짜 모름)에 공개되었으므로 짧게는 두달 20일, 많게는 세 달쯤 뒤의 일이다. 같은 달 2월 16일, 세종이 최항과 박팽년 등에게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한 지 나흘 뒤의 일이었다. 이 상소문으로 세종과 최만리는 명논쟁을 역사에 남기게 된다. 상소문과 논쟁 과정이 고스란히 세종실록에 실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종은 막판에 화를 참지 못하고 7명을 옥에 가두는 실수를 하게 된다. 그것을 후회해서인지 하루 만에 풀어 주었지만 끝내 정창손은 파직을 당하고 김문은 더 심한 옥고를 치르게 된다. 흔히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고 하지만 이때는 이미 창제한 뒤이므로 반포를 반대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최만리는 비록 훈민정음 보급을 반대했는데 그의 반대 상소 덕에 창제 배경과 과정에 얽힌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었다. 세종과 세종을 지지한 정음학자들은 이 상소 덕에 반대 쪽 사람들의 생각을 제대로 알게 되었고 새 문자 해설서를 더욱 잘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한국문화신문 = 김슬옹 교수] 한글은 1443년 12월(음력)에 창제되고 1446년 9월 상순(음력)에 반포되었다. 북한은 창제한 날을 기리고 남한은 반포한 날을 각각 양력으로 바꿔 기린다. 그래서 북한의 조선글날(훈민정음 기념일)은 1월 15일이고 남한의 한글날은 10월 9일이다. 창제를 기리는 의미에서 한글에 대한 기본 상식 또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퀴즈 28 문제를 마련해 보았다. * 맞춘문제 수: 25문제 이상 -아주 뛰어남 / 20문제~24문제 - 뛰어남/19문제 ~ 15문제 보통 / 14 ~10문제 - 노력 필요 / 9문제 이하 - 치열하게 노력 필요 ▲ 세종은 백성을 위해 쉽게 배울 글자를 고민했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한글 기본 상식 짚어보기 0X 28문제 1. 세종이 우리말을 만들었다.( ) 2. 한글을 창제한 사실을 세종이 처음 알린 날은 1443년 12월(음력)이다. ( ) 3. 한글(훈민정음)을 일반 백성들에게 반포한 날은 1446년 10월 9일(음력)이다. ( ) 4. 한글은 조선시대 고종의 국문 칙령이 반포(1895년) 되기 전에는 공식문자(공용문자)가 아니었다. ( ) 5 한글은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함께 창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