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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금석문 톺아보기 22] 신흠신도비(申欽神道碑)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1699년(숙종 25년)에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에 건립된 신흠(申欽)의 신도비이다. 비의 찬자는 이정구(李廷龜)이고 서자는 심열(沈悅)이며 제액(題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로 썼다.

비문에 따르면 신흠(1566∼1628년)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으로,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고 어머니는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기수(麒壽)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承仕郎)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3년에 외숙인 송응개(宋應漑)가 이이(李珥)를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士林)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 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黨與)라는 배척을 받아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그 뒤 병조좌랑 등을 역임한 후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동인의 배척으로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에 좌천되었으나 전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도 활약했다.

   
▲ 신흠신도비(申欽神道碑)

1594년에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 윤근수(尹根壽)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599년에는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되기도 하였다. 1604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그 뒤 병조판서·예조판서·상호군(上護軍)·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인 까닭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16년 인목대비 (仁穆大妃)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김제남(金悌男)에의 가죄(加罪)와 함께 다시 논죄된 뒤 춘천에 유배되었으며 1621년에 사면되었다. 1623년(인조 원년)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난했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1651년(효종 2년)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상촌집』·『야언(野言)』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그는 벼슬에 나가서는 서인인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대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 중기 선조~인조대의 정국 속에 자리했던 신흠의 행적과 가계 및 성품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붕당 정치의 동향도 살필 수 있는 비문이다.

연대: 1699년(숙종25년)
문화재지정:시도지정문화재 - 경기도기념물 제 145호
문화재지정:높이 215cm, 너비 94cm, 두께 208m
출토지: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
소재지: 경기도박물관-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 
서체: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이정구(李廷龜) / 심열(沈悅) / 미상

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