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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세종이 태어날 때의 사회환경은 어땠나?

어린 이도(세종)의 역사의식 1

[그린경제/얼레빗 = 홍사내 기자]  현대 사회는 이른바 자유주의(liberalism)가 얼마큼 존중되는가를 중시한다. 리버럴리즘은 이미 서양 17세기 시민혁명 이후 끊임없이 대두되면서 사회 변혁과 개인의 자유를 대변해 주는 정신으로 존중되어 왔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민주화를 위해서도 그 잣대 구실을 해왔다. 서양의 근현대사에서는 봉건 체제에 반대하여, 의회제도, 권력분립, 법의 지배, 개인 인권의 자유 보장, 사유 재산제에 기초한 시장경제의 확립 등이 전개되었고, 종교개혁에서의 신앙의 자유즉 인간정신의 전면적 개화까지 자유주의에 추가되었다.  

20세기 들어서는 비대해진 정부조직의 재정 적자에 대한 비판으로 권력의 축소를 요구하는 자유주의가 대두한다. 법의 지배하에 선택의 자유나 소비자주권, 자기결정권 등의 요구를 내걸고 복지 국가제도를 개혁하기도 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지금 대한민국에서 진행되는 정치적 발전과 사회적 변혁은 개화기 이후 10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정신없이 달려온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두 깃발 아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이념적 핵심은 개인의 삶과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15세기 조선시대를 현대 이념으로 바라볼 수는 없지만, 봉건 왕권 통치 안에서 백성의 자유와 형평성, 개인의 인격과 인권을 존중하는 일은 전적으로 통치자 임금의 역량에 달려 있으므로, 왕권이 지배자 또는 통치자로서 독재적 권력만을 행사할 경우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한 나라의 존폐가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통치 방법과 판단력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봉건 사회, 왕권 사회에서도 사람을 잘못 쓴다거나 외교적 판단을 명확히 하는 것 등이 정치적 혼란과 국가의 존폐를 가름할 때가 많았다. 그 속에서 다양성의 존중과 그들 사이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세종은 우리 역사상 가장 균형감각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백성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이 대단하였고, 외교력도 누구보다 뛰어난 임금이었다. 그가 태어난 때의 사회환경은 그의 가치관, 역사인식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세종이 태어나고 자라던 15세기 초는 그야말로 우리 겨레의 역사 중 가장 격변기였으며, 혼란기였다. 할아버지가 나라를 뒤엎고 새나라를 세워 그 첫 임금이 되었고, 아버지는 많은 형제들을 살육하면서 임금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세종 또한 장자를 제치고 셋째아들로서 임금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 세종이 어릴 때 독서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제공)

조선 태조 이성계는 창업을 완성하고 이름을 단으로 고쳤다. 그 아들이 여덟이었으니 첫째가 진안대군 이방우요, 둘째는 정종 이경(처음 이름은 이방과)이고, 셋째는 익안대군 이방의이고, 넷째는 회안대군 이방간이며, 다섯째가 세종의 아비인 정안군 이방원(태종)이다. 여섯째는 덕안대군 이방연, 일곱째는 무안대군 이방번, 여덟번째는 의안대군 이방석이다. 전주이씨로서 전주는 본래 백제의 완산인데, 신라 진흥왕이 완산주를 설치했고, 경덕왕이 이를 고쳐 처음 전주라 불렀으니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이다.  

먼저 세종이 태어난 1397년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을 개국한 지 5년 뒤였으니, 무력으로 이룬 창업이 가져오는 정치적 불안감이 항상 고조되어 있었으며, 아들들의 다툼과 이에 좌충우돌하는 신하들의 이합집산이 정쟁과 옥사로 이어져 피를 부르고 개국 초기의 혼란함이 끊이지 않은 상태였다. 

창업 시기부터 세종의 아버지 이방원은 태조의 다섯째아들임에도 활동력이 어느 아들보다도 강하여 중국 황제에게까지 가서 화해를 이루고 온 아들이었다. 태조 큰아들 이방우는 아비가 임금되기 전에 이미 죽었으므로 둘째 이방과가 왕위에 올라 정종이 되었다. 정안대군 이방원은 먼저 아비 태조와 정도전이 세자로 세운 여덟째아들 이방석을 세자에서 폐하도록 하고 정도전을 처단하였고, 이에 격분한 태조 이성계는 이방원의 꼴을 보기 싫어 함흥으로 피하여 들어가 태종이 문안을 여쭈려고 사신을 보냈지만 보내는 족족 돌아오지 않으니 함흥차사란 말이 생겼다.  

장자로서 정종이 즉위한 뒤 그의 적자가 없었고, 넷째아들 이방간이 박포와 더불어 정안군 이방원(태종)을 없애려다가 귀양을 갔다. 셋째인 이방의는 품성이 착하여 아무런 뜻이 없었으니 결국 이방원의 뜻을 막을 자 아무도 없었고 드디어 왕자들의 싸움에 주눅이 든 정종은 즉위 22개월 만에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할아비 태조가 즉위할 때에 태어나서, 임금이 될 당시엔 정종, 태종이 상왕으로 살아 있었으니 왕실의 명령과 위계가 참으로 복잡하였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더욱이 세종도 장자가 아니라 셋째아들이니 또한 여러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첫째아들 양령대군을 폐세자로 만들면서 장자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는 동양의 정통적 계승체제를 무너뜨리고 세종은 임금이 된 것이다. 

세종임금은 태어난 때 맨 처음 막동이라 불리었다. 막동이 태어난 지 3년 뒤인 정종 2(1400)에 태조 넷째아들 이방간이 다섯째아들 이방원(태종)의 위세를 시기하여 난을 일으키매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종 김소근을 시켜 방간을 쫓으라 하였다. 방간이 혼자서 달려 묘련 북동으로 들어갔다. 김소근이 미처 보지 못하고 곧장 달려 성균관을 지났는데 탄현문에서 오는 자를 만나서 물으니 모두 모른다고 하였다. 김소근이 도로 달려 보국 서쪽 고개에 올라가서 바라보고 방간이 묘련 북동에서 마전 갈림길로 나와서 보국동으로 들어갈 때 잡아 무릅을 꿇렸으며 갑옷을 벗기고 교서를 받아 난이 평정되었다.  

이때 정안공(태종)의 집 말이 화살을 맞고 제 마굿간으로 돌아왔는데, 부인이 놀라 짐작하기를 싸움에 패한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싸움터에 가서 공과 함께 죽으려 하여 걸어서 나가니, 시녀들이 만류하여 간신히 막았다.  

앞서 난이 일어날 즈음 정안공이 말을 타고 나가자, 부인이 무당들을 불러 승부를 물었다.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이길 것이니 근심할 것 없습니다.’ 하였다. 이웃에 정사파라는 자가 살았는데, 이름은 가야지였다. 역시 그에게 꿈이야기를 하기를, ‘어젯밤 새벽녘 꿈에, 태양이 공중에 있었는데, 아기 막동이가 해바퀴 가운데에 앉아 있었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하니, 정사파가 점을 보기를, ‘정안공께서 마땅히 왕이 되어서 항상 이 아기를 안아 줄 징조입니다.’ 하였다. 부인은 그것이 무슨 뜻이며, 당치도 않다고 여기고 정사파를 돌려보냈다. 곧이어 정안공이 이겼다는 말을 듣고 안심하였다 한다.(정종실록 참조)

2014.1.10.©홍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