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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내의 세종한글 길라잡이

세종의 조상은 어떤 사람들일까?

홍사내의 세종한글 길라잡이 9

[그린경제/얼레빗 = 홍사내 기자]  사공(봉작, 1)은 휘가 한(; 이성계의 21대조)인데 신라에서 벼슬하여 태종무열왕 10세 손자 군윤인 김은의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 자연(自延; 20대조)을 낳았고, 시중이 복야 천상(天祥; 19대조)을 낳았고, 복야가 아간 광희(光禧; 18대조)를 낳았고, 아간이 사도삼중대광 입전(立全; 17대조)을 낳았고, 사도가 긍휴(兢休; 16대조)를 낳았고, 긍휴가 염순(廉順; 15대조)을 낳았고, 염순이 승삭(承朔; 14대조)을 낳았고, 승삭이 충경(充慶; 13대조)을 낳았고, 충경이 휘 경영(景英; 12대조)을 낳았고, 경영이 충민(忠敏; 11대조)을 낳았고, 충민이 화(; 10대조)를 낳았고, 화가 진유(珍有; 9대조)를 낳았고, 진유가 궁진(宮進; 8대조)을 낳았고, 궁진이 대장군 용부(勇夫; 7대조)를 낳았고, 용부가 내시집주 인(; 6대조)을 낳았고, 인이 시중 문극겸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 양무(陽茂; 5대조)를 낳았고, 양무가 상장군 이강제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사(安社; 4대조)를 낳았으니, 이분이 바로 목조(穆祖)이다. 

전주(全州)에서 강릉도 삼척현으로 옮겼다가, 삼척에서 바다를 건너 덕원으로 갔었다. 고려에서 그를 의주병마사로 임명하고 고원에 진을 설치하여 원나라 군사를 막게 하였다. 이때에 영흥 이북은 원나라 지방행정구역인 개원로(開元路)에 속하였다. 원나라 산길대왕이 와서 쌍성(영흥)에 주둔하여, 철령 이북을 차지하려고 계획하면서, 목조에게 원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하므로, 목조가 부득이하여 김보로 등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때는 고려 고종 41(1254)이었다. 갑술년(1274) 12월에 목조가 경흥부에서 훙()하므로 성 남쪽에 장사하였다가, 뒤에 함흥부의 의흥부 달달동에 이장하였다. 천우위장사 이공숙의 딸에게 장가들어 행리(行里; 3대조)를 낳았으니, 이분이 곧 익조(翼祖)이다. 

적도로 피란하였다가, 뒤에 덕원에 옮겨 살았다. 안변호장 최기열에게 장가들고 낙산 관음사에 아들 낳기를 빌어 아들을 낳았으니 선래(善來; 2대조)라 이름지었다. 이분이 곧 도조(度祖)이다. 휘는 춘(椿)인데 어릴적 이름이 선래요, 몽고 이름으로는 학안첩목아(學顔帖木兒)이다. 문하시중 박광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는 자흥(子興)이요, 둘째는 곧 우리 환조(桓祖)이니, 휘는 자춘(子春; 아버지)이요, 몽고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이다. 공민왕을 섬겨 태중대부 사복경이 되었고, 집 한 구역을 받으므로 거기서 머물러 살았다. 

   
▲ 조선 세종 때 선조인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에 이르는 여섯 대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표지(왼쪽), 본문 첫장

문하시중 영흥부원군이며 시호가 정효공인 최한기의 딸에게 장가들어 충숙왕 4(1264) 1011일에 영흥부 사저에서 태조(太祖; 이성계)를 낳았다. 즉위하게 되자, 4대의 존호를 뒤따라 올리되, 고조고를 목왕, 그 능을 덕릉, 비 이씨를 효비, 능을 안릉이라 하고, 증조고를 익왕, 그 능을 지릉, 비 최씨를 정비, 능을 숙릉이라 하고, 조고를 도왕, 능을 의릉, 비 박씨를 경비, 능을 순릉이라 하고, 황고를 환왕, 능을 정릉, 비 최씨를 의비, 능을 화릉이라 하고, 봉상시로 하여금 4대의 신주를 조성케 하였다. 

우왕 때에 태조가 최영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임견미, 염흥방 등을 죽일 때에, 태조와 최영이 정방에 앉았는데, 최영이 임과 염이 등용한 사람은 모두 내치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임과 영이 정권을 잡은 지 오래되어 모든 사대부가 다 그의 등용한 사람이다. 지금은 다만 그 재질이 현명한지 않은지만 물을 일이지, 어찌 지나간 일까지 허물하겠는가?” 하였으나, 최영은 듣지 않았다.  

토조가 호발도를 토벌하고 돌아오다가 안변에 이르렀는데, 비둘기 두 마리가 밭 가운데 뽕나무에 앉아 있었다. 태조가 활로 쏘니 한거번에 두 마리가 다 떨어졌다. 길가에 두 사람이 밭을 매고 있었는데 하나는 한충이요, 하나는 김인찬이었다. 보고 탄복하기를, “도령의 활쏘는 솜씨가 기묘합니다.” 하였다. 태조가 웃으며, “내가 이미 도령을 지냈다.” 하고, 인하여 두 사람을 시켜 먹을 것을 가져오게 하니, 두 사람이 조밥을 가져왔다. 태조가 그대로도 수저를 들었다. 두 사람이 드디어 따라다니고 가지 않았다. 뒤에 모두 개국공신의 반열에 참예하였다.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리기 전에 태조가 살던 마을에, “서경(西京) 성밖 불빛이요, 안주 성밖 연기로세. 그 사이 왕래하는 이 원수(李元帥), 백성 구제 소원일세.”라는 동요가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군사를 돌려 왔던 것이다. 군사를 돌린 후에, 윤소종이 정지를 소개하여 태조에게 만나기를 정하여, 󰡔곽광전(藿光傳)󰡕을 품고 와서 바쳤다. 조인옥으로 하여금 읽게 하고 들었는데, 조인옥이 왕씨를 다시 세우자는 의론을 극력히 진술하므로, 이성계가 왕씨의 후손을 세우려 하자, 조민수는 우왕의 외삼촌인 이임의 척당으로서, 우임금의 아들 창()을 세우려고 이색(李穡)에게 문의하여 드디어 의론을 확정하였다.  

이성계의 잠저 시절에 어떤 사람이 문앞에 찾아와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지리산 바윗돌 속에서 얻었습니다.” 하였다. 그 글에는,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다시 삼한의 지경을 바루리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이성계가 사람을 시켜 영접해 들이게 하였는데, 찾아도 볼 수 없었다. 고려의 서운관에 비장된 기록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는 말이 있고, 왕씨가 망하고 이씨가 일어난다.’는 말이 있었는데, 고려가 망할 무렵까지 숨기고 발표하지 않았다. 또 사람의 운명을 잘 알아맞히는 혜징(惠澄)이란 자가 몰래 그의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남의 운명을 점친 것이 많으나 이성계와 같은 이는 없다.” 하였다. 그 친한 사람이 묻기를, “운명이 비록 좋더라도 지위가 정승에 이를 뿐이겠지.” 하니, 혜징이 말하기를, “정승 같으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맞추어 본 것으로는 임금이 될 운명이니, 그가 왕씨를 대신하여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몽주가 도성과 헌부를 사주하여 조준과 정도전 등을 죽이기를 청하므로, 이성계가 아들 방과(공정왕)과 아우 화(), 사위 이제, 부하 황희석, 조영규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 변론하게 하였다. 방원(태종)이 숭교리에 있는 옛사저 사랑에 앉아 걱정하면서 결정을 못하다가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급히 나가보니, 광흥창사 정탁이었다. 정탁이, “민생의 이해가 이 시점에 있어 결정될 것이요, 왕후장상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느냐?”라고 극력히 말하였다. 

방원(태종)이 곧 이성계의 집으로 돌아오므로, 방과(공정왕, 정종), 이화, 이제와 더불어 이두란을 시켜 정몽주를 처죽이게 하니, 이두란이 말하기를, “우리 공(이성계)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하였다. 방원이 조영규에게 말하기를 조영규가 분하여 말하기를, “어찌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조영무, 고여, 이부 등과 더불어 길에서 정몽주를 맞아 쳤으나 맞지 않았다. 정몽주가 꾸짖으면서 말을 채찍질하여 다라났으므로 조영규가 뒤쫓아 가서 말머리를 치니 말이 넘어졌다.  

정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 급히 달아나니 고여가 추격하여 죽였다. 방원이 이성계에게 고하니 이성계가 매우 화를 내면서 방원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이 본래부터 충효로 이름이 났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이느냐? 남들이 내가 몰랐던 일이라고 한들 믿겠느냐?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치는 것은 충신되고 효자되기를 바라는 것인데, 네가 감히 효도롭지 못한 짓을 이와같이 하였으니, 내가 약이나 먹고 죽어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하였다. 강비(이성계 둘째부인, 방원의 어머니는 첫째부인 신의왕후임)가 옆에 있다가 안색을 가다듬고 고하기를, “공께서 매양 대장군으로 자처하셨거늘, 어찌 놀래고 겁내기를 이와같이 하십니까?” 하면서 자중하기를 청하였다.  

(1392) 717일에 이성계가 공민왕비 안씨의 교서를 받고 수창궁에서 즉위하였다. 백관들이 반열을 지어 궁문 서쪽에서 맞이하므로, 태조가 말에서 내려 보행으로 궁궐에 들어가 즉위하되 용상을 피하고 기둥 안에 서서 군신들의 축하를 받았다. 18일에는 비가 왔다. 그때까지 오래도록 가물다가 태조가 즉위하자 흐뭇하게 비가 내린 것이니, 백성의 인심이 크게 기뻐하였다.

-󰡔동각잡기󰡕(이정형 지음) 상편 내용 발췌- 

당시 신진 사대부는 고려말의 사회적 모순을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던 온건파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급진파로 나뉘어 있었다. 온건파로는 정몽주, 이색 등이 있었고, 급진파로는 정도전이 대표적이었다. 처음에는 신진 사대부 전체가 이성계와 협력하여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왕위에 앉히는 등 정견을 같이하였지만, 새로운 왕조를 향한 급진파의 급격한 추진력은 결국 두 세력을 반목하게 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정도전과 결탁하여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고려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던 정몽주를 마지막으로 제거함으로써 역성혁명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위 글에서는 바로 정몽주의 제거를 세종의 아버지인 방원(태종)이 하였다고 적고 있다. 정몽주가 제거됨으로써 4개월 뒤,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다.(2014.1.27.©홍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