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김슬옹 기자] 인류 최고의 발명품, 훈민정음. 세종은 어떻게 이런 발명을 할 수 있었을까?
흔히 세종은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던 임금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임금이었기에 성공은 가능했겠지만 그것이 바탕스러운 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후대 임금들은 발명해 놓은 문자조차 세종만큼 온 몸으로 실천한 임금은 없기 때문이다. 제2의 세종이라 추앙받는 정조조차 한문 위주의 실천과 정책을 폈다.
그렇다면 세종이 대천재라고 가능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노력하는 천재라고 하면 말이 맞다. 그러나 그조차도 정확한 답은 아니다. 천재라는 말은 타고난 재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말이기 때문이다.
▲ <훈민정음반포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제공
그럼 도대체 뭣이란 말인가? 나는 그 답을 《세종실록》을 읽다가 발견했다.
1440년, 그러니까 세종 22년 1월 30일의 사건이다.
“병진년에 최해산이 도안무사가 되어 급히 아뢰기를, ‘정의현(旌義縣)에서 다섯 마리의 용이 한꺼번에 승천하였는데, 한 마리의 용이 도로 수풀 사이에 떨어져 오랫동안 빙빙 돌다가 뒤에 하늘로 올라갔습니다.’라고 하였다. 다급하게 보고를 받았지만 세종은 오히려 차분하게 묻는 임금의 교지를 내렸다. 그 내용이 마치 과학 탐구 발문 같았다. 세종은 이렇게 물었다.
‘용의 크고 작음과 모양과 빛깔과 다섯 마리 용의 형체를 분명히 살펴보았는가.
또 그 용의 전체를 보았는가,
그 머리나 꼬리를 보았는가, 다만 그 허리만을 보았는가.
용이 승천할 때에 구름 기운과 천둥과 번개가 있었는가.
용이 처음에 뛰쳐나온 곳이 물속인가, 수풀 사이인가, 들판인가.
하늘로 올라간 곳이 인가에서 거리가 얼마나 떨어졌는가.
구경하던 사람이 있던 곳과는 거리가 또 몇 리나 되는가.
용 한 마리가 빙빙 돈 것이 오래 되는가,
잠간인가. 같은 시간에 바라다본 사람의 이름과, 용이 이처럼 하늘로 올라간 적이 그 전후에 또 있었는가와, 그 시간과 장소를 그 때에 본 사람에게 방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
그 당시의 UFO 같은 용에 대한 보고인지라 이렇게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이렇게 물음을 던진 것이다.
뒤에 제주 안무사는 이렇게 아뢰었다.
“시골 노인에게 물으니, 지나간 병진년 8월에 다섯 용이 바다 속에서 솟아 올라와 네 용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구름 안개가 자우룩하여 그 머리는 보지 못하였고, 한 용은 해변에 떨어져 금물두(今勿頭)에서 농목악(弄木岳)까지 뭍으로 갔는데, 비바람이 거세게 일더니 역시 하늘로 올라갔다 하옵고, 이것 외에는 전후에 용의 형체를 본 것이 있지 아니하였습니다.”(번역은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번역을 바탕으로 일부 표현을 쉽게 풀었음.)
▲ 《세종실록》 22년 1월 30일 치 원문
세종의 합리적인 물음이 있었기에 이런 과학적인 답변이 나왔다. 세종의 이런 탐구력은 조선의 과학을 당대 최고의 과학으로 끌어 올렸고 그러한 과학을 바탕으로 과학의 문자 훈민정음 창제했다.
세종은 끊임없이 물었다. 왜 우리는 죽어서까지 중국의 음악을 들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중국 농서를 보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중국 황제가 중국 하늘을 보고 만든 표준 시간을 따라야 하는가? 왜 우리는 우리말과 말소리를 제대로 적을 수 없는 한문만을 써야 하는가?
세종과 다른 사대부의 차이는 임금과 신하라는 차이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이런 묻는 태도였다. 사대부들은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았고 던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종의 물음은 가장 창조적인 훈민정음을 낳았고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의 뿌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