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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흉년에 구제받은 백성들 나라에 "선행 기려달라" 간청

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20) 평산신씨 인량문중 종가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경북 영덕군 창수면에 있는 마을 인량리는 앞에 넓은 평야를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 “만괴헌”이라는 평산신씨 인량문중 종택이 있다. 이 종가는 고려초의 대표적 개국공신 신숭겸장군의 후손들이 충효 사상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만괴헌(晩槐軒)이란 이름은 1798년에 태어나 1855년 세상을 뜬 신재수(申在洙) 선생의 호다.  


   

                                ▲ 만괴헌 전경


두해의 흉년, 가난한 이들 구제에 4천 냥을 쓰다 


1836(병신)과 1837(정유)년 두 해에 거듭된 흉년으로 온 나라가 기근에 허덕일 때 만괴헌 선생은 병신년 겨울부터 이듬해 정유년 봄까지 4번에 걸쳐 곳간을 활짝 열고 굶주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당시 영해지방은 흉년에 대비한 식량 비축도 없었고, 경상감영이나 나라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괴헌 선생이 고을 사람들이게 나눠준 구휼미는 당시 가치로도 무려 4천 냥에 이르렀다. 이에 굶어죽는 것을 모면한 사람들은 그 고마움을 알리기 위해에 앞 다투어 부사와 관찰사에게 등장(等狀, 여러 사람이 이름을 잇대어 써서 관청에 올려 하소연하는 문서)과 의송(議訟, 조선시대 백성이 관찰사에게 올리던 민원서류) 등을 올려 선행을 기려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저희들은 흉년을 당하여 밥 짓는 연기가 끊어진 지 오래고 아비와 자식이 서로 헤어지며 엎어진 주검이 잇닿아 이를 슬퍼하는 울음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으니 가엾은 형상은 참혹해서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본 마을에 사는 유학자 신재수가 특별히 의로운 마음을 발휘하여 죽는 사람을 구원하고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건지기 위해 네 번이나 식량을 나누어 주었는데 수량이 적지 않사옵고…….” 


특히 영해읍 다섯 마을 백성이 올린 의송은 간절함이 철철 넘쳤다. “어떤 이는 돈이 있고 곡식이 있어도 깊이 감추어두고 팔지 않기를 주로 하며 땅을 넓히고 재산을 불리기에 힘쓰나 우리 고을 선비 신재수 한 사람은 특별히 쌀과 벼 일백 다섯 섬과 돈 이백 냥을 내어 공적으로 고을 백성을 구조한 일이 관보 속에 자세히 있으니 이것은 한 고을 사람들에게 고른 혜택이 되었습니다.(중간 줄임) 민심을 모아 임금께 보고 드려 이를 드러낼 수 있는 명령을 내리실 수 있도록 분부하여 주시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 의송과 등장


   

               ▲ 의송과 등장에 대한 경상감영 관문


이런 등장(等狀)과 의송(議訟)은 쌀을 받은 백성은 물론 관청의 군노들까지 나서서 상주기를 요청할 정도였다. 이렇게 빗발치는 등장과 의송에 경상도 감영에서는 다음과 같은 제음(題音, 백성이 관부(官府)에 제출한 소장(訴狀) · 청원서 · 진정서에 대하여 관부에서 써주는 처분(판결문 · 처결문)으로, 뎨김이라고도 한다.)을 내린다.  


“관찰사 겸 순찰사가 상고한 일 곧 본부 읍내 면에 사는 주민들의 호소를 살펴보니 본동에 사는 유학 신재수가 남을 돕는 재물을 내어 네 번이나 굶는 사람들에게 양식을 제공하고 백미 30석을 내어 가난한 백성을 고루 먹여 전후로 들어간 재물이 사천 냥(1차 출연금만 계산한 금액이고 2차 출연분은 빠진 것임, 편집자 말)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이처럼 선행을 좋아하는 사람을 묻어두는 것은 옳지 않으니 곧 조정에 보고하여 상을 논의하라고 하였다. 신재수가 백성을 고루 구호한 것을 들으니 지극히 가상하다. 이런 선행을 권장하고 격려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그냥 둘 수가 없으나 소수 백성의 호소를 그대로 믿기 어려우므로 이에 관문((官文, 관공서에서 작성한 문서)을 발송하는바 속히 그 사실을 자세히 알아본 뒤 백성을 구휼한 숫자를 자세히 책으로 만들어 보고하여 상을 논의하는 증거를 삼을 수 있도록 함이 마땅함.” 


이렇게 백성이 등장과 의송을 올림에 따라 부사와 관찰사, 경상도 감영은 철저한 조사를 거쳐 조정에 보고하여 드디어 병조에서 교지가 내려졌다.  


“전하의 명에 따라 유학 신재수에게 ‘효력부위용양위부사용(效力副尉龍驤衛副司勇, 동해안을 지키는 무관 직책)’이라는 벼슬을 내린다. 도광(道光, 청나라 선종의 연호) 17년(1837) 7월 일” 


   

                   ▲ 신재수 공에게 벼슬을 내린 교지.


그뿐만이 아니다. 만괴헌 선생은 이때 영해향교의 태화루를 중수하는 경비를 조달했다. 영해향교는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대성전과 동서무를 지었고, 조선 중종 24년(1529)에 다시 명륜당과 태화루를 증설하는 등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는 곳으로 건물이 낡아 경비를 선뜻 희사한 것이다.  


또 영해는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많은 피해를 당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방어시설이 많이 훼손되어 보수가 시급했다. 이에 선생은 읍성문을 보수하여 방어태세를 갖추는 일에 혼자 경비를 부담했다는 사실이 《영녕승람(盈寧勝覽)》과 《양로소완의(養老所完議)》에서 확인된다.


만괴헌 선생은 1838년 노인소(양로소) 별유사(책임자)를 맡았다. 하지만 병신ㆍ정유년에 걸친 흉년으로 노인소의 재원이 바닥나 더는 활동을 이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본 선생은 용당평 논 26마지기와 사천평 논 24마지기 모두 50마지기를 내놓아 운영을 정상화하였다. 또 재정적으로 어려워진 영해향교에 20냥, 단산서원(丹山書院,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있었던 이색을 모신 서원)에 30냥을 내놓아 운영을 정상화시켰다.  


의병활동과 3·1만세운동에 뛰어든 종가 


고려초 신숭겸장군의 충효사상을 이어받은 평산신씨 인량문중 종가는 대한제국 말기 다시 나라를 위한 싸움에 나섰다. 일본 세력이 갑오경장을 실시하고 단발령을 내린 것은 물론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온 나라는 의병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해지방에서는 명성황후 시해 다음해인 병신년(1896)에 신돌석, 이수악, 신운석, 박대춘, 김노헌 장군 등이 지휘하는 의병부대가 조직되었다. 이때 평산신씨 인량문중 종가의 33세 신의영(申義泳) 공은 54살 때 이수악 장군이 지휘하는 의병부대의 관재(管財), 그리고 관향(管餉)이라는 직책을 맡아 의병부대의 재정을 담당했다.  


이후 신돌석 장군의 2차 의병이 일어났을 때 공은 이미 60살의 고령이 되어 의병에 직접 참여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대신 의병자금 조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이때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의병을 지원한 군자금을 만괴헌 증축비나 골동품 구입자금으로 위장했다고 한다.  


이런 신의영 공의 충의정신은 조카 34세 상문(相文) 공에게까지 이어진다.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지자 영해지방도 3월 18일 유례가 드물게 3천 명이라는 대규모 백성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공은 대열 맨 앞에 서서 군중을 이끌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재소로 달려가 일본 경찰에게도 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여 만세를 부르게 한 대담한 인물이었다. 또 앞장서서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 건물을 파손하고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렸음은 무론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곧바로 보복에 들어가 대구에 있는 보병 80연대에서 17명의 왜군이 출동하여 영해 주재 헌병과 합세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시위군중 8명이 현장에서 죽고 16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 모두 170명이 체포되었는데 이들은 심한 고문을 당해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정부에서는 신상문 독립지사의 독립운동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주검을 대전국립묘지에 모셨다.  


   

         ▲ 국립대전현충원의 신상문 선생 무덤과 건국훈장 애족장 훈장증.


   

                                                      ▲ 장절공 신숭겸 영정.


묘비에는 공의 방계 증손인 신귀현 선생이 지은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왜적이 침탈한 조국의 자주독립. 호국의 정신으로 국권을 회복하려 기미년 3월 1일 영해읍 장터에서 힘차게 외치신 독립만세 그 함성을 묘비의 이 돌 속에 문자로 새기오니 소리 없는 메아리를 후대에 전파하여 민족의 애국심을 영원무궁 일깨우는 정의의 종소리로 온 세상을 울리소서!” 


평산신씨의 시조는 고려 초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927)이다. 927년 견훤이 고울부(高鬱府 :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景哀王)을 죽인 다음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문하는 동시에 친히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자 이때 공은 김낙(金樂) 등과 함께 싸워 태조를 구하고 전사했다.


이때 공의 죽음을 상세히 적은 《평산신씨 인량문중 세계사적(平山申氏 仁良門中 世系事蹟)》을 보면 태조와 얼굴이 닮은 장절공이 자청하여 태조로 위장했으니 견훤의 군사가 공을 태조로 여기고 공의 머리를 잘라 창에 꿰어 달아났다. 뒤에 태조가 주검을 찾아 나무로 머리를 만들게 하고 친히 제사를 지내며 통곡했다고 기록되었다. 공이 없었으면 고려도 없었음이 분명한 충절의 역사다. 


   

▲ 종가 주손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서양철학을 전공한 신귀현 선생은 동서양 학문을 아울러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평산신씨 인량문중 종가 현 종손 신귀현(申龜鉉) 선생을 만난 것은 2014 갑오년 새해 초였다. 선생은 종가의 종손으로서는 드물게 스위스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한 철학박사로 영남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한 뒤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는 분이다. 서양학문에 뒤지지 않게 동양학에도 뛰어나 현재 퇴계학연구원 이사와 동양고전연구소 고문을 지내고 있으며 600쪽에 달하는 《평산신씨 인량문중 세계사적(平山申氏 仁良門中 世系事蹟)》을 직접 국역하여 펴내는 등 선조의 자취를 찾아 기록하는 일에 온 정성을 쏟고 있었다.


이러한 한학의 기초는 어렸을 때 학문이 높은 할아버지로부터 5년 동안 한문을 집중 배웠던 것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조상대대로 어려운 백성을 보살피고 나눔을 실천한 가문답게 선생은 대담 내내 온화한 인품으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털어 가난한 이를 구제하고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에 앞장 섰던 종가! 삭막해져 가는 오늘날 사회에 큰 귀감이 되고 있는 평산신씨 인량문중 종손을 만나고 대구에서 만나고 올라오는 길은 추운 날씨였지만 마음이 더 없이 훈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