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서한범 명예교수] 지금 속풀이는 소리극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지난주에는 창극이 1900년대 전후에 시작되었다는 이야기, 광무(光武)초부터 서울 동대문 안에 협률사(協律社)가 자리를 잡고 일반 흥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 후 그 자리에 광무대(光武臺)가 세워지면서 이를 속칭 <광무대 협률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이전의 1인 창극조였던 판소리는 분창의 형식, 즉 대화창의 형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또 협률사에서 판소리와 경서도 명창 170여명이 1902년 가을로 예정되었던 고종의 칭경식을 준비하였으나 전염병이 돌고, 영친왕(英親王)의 천연두, 농황사정이 여의치 않은 점,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 악화 등으로 다음해에 예식만 간단하게 치루었다는 이야기, 협률사는 원각사로 바뀌었고 동대문 곁에 광무대, 사동에 연흥사(演興社), 낙원동에 장안사(長安社), 종로에 단성사(團成社)등 본격적인 대중 공연장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극장에서는 판소리를 변형시킨 창극의 시도와 함께, 낮에는 뚝섬이나 왕십리의 선소리패나 농악패들을 불러 볼거리를 제공하였다는 이야기 등도 하였다.
1934년,《조선성악연구회》가 창립되면서 많은 소리꾼들이 창극 활동을 보다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창극이란 판소리를 기본으로 하는 음악극이다. 이 당시는 판소리도 지금처럼 완창의 개념이 아니라 부분적인 토막소리가 대세였던 것이다. 이러한 공연상황에서 이야기가 있는 창극, 각색이나 연출의 개념을 도입해서 본격적인 연극양식을 갖추어 시각적, 청각적 효과를 모색한 창극이 보다 활발해 지기 시작한 것이다.
1940년대 말에는 여성국극단들이 조직되면서 공연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여 1950년대까지는 가히 국극의 시대라 할 만큼 대단한 인기 속에서 흥행을 주도하였다. 종래의 창극이라 부르던 명칭도 국극으로 고쳐 부르며 이제는 당당한 독립국가의 전통성 있는 연극 양식임을 표방하고 나선 것이다. 여성국극의 기세는 대단했다. 작품이 좋고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국극일 경우, 이른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렸다고 하니 그 인기를 족히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연극평론가들도 초창기 여성국극단의 활동이 대중적 인기를 장악하는 현상에 대해 하나의 작품이 단 1년여 만에 전국을 뒤흔들어 놓고 뚜렷한 대중예술 장르로 자리를 굳힌 예는 세계 연극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라고 여성국극단의 활약상을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 여성국극은 출연자 전원이 여성이라는 점만 이전의 창극단과 차별성을 가질 뿐, 실제로는 1900년대 초기의 분창이나 대화체에서 발전한 그 이후의 창극의 형태와 대동소이한 것이다.
참고로 1948년에 결성된 여성국악동호회의 주요 인물들로는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박초월, 임유앵, 신숙, 임춘앵, 등 판소리 여류명창으로 그들은 일찍부터 창극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여성 출연자만으로 구성된 극단의 경우, 일본은 1913년부터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있었고 중국도 1927년부터 여성들만의 극단이 존재해 오고 있다. 우리 여성국극의 중심 역할을 했던 박귀희가 일본의 다카라즈카를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는 회고담을 통해서도 이러한 공연 형태에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6.25 직후, 문화예술에 굶주린 대중들의 마음을 음직인 탓인지, 별다른 대중 예술이 자리를 잡지 못한 탓인지는 몰라도 하여간에 1950년대는 여성국극의 전성기였다.
▲ 임춘앵을 주축으로 하는 여성국악동지사의 "대춘향전" 광고(동아일보 1952.12.2) |
대표적인 창극단체로는 <햇님국극단>, 임춘앵을 주축으로 하는 <여성국악동지사>, 이일심의 <낭자국악단>, 김원술의 <여성국극협회>, 김연수의 <우리국악단>, 박보아의 <삼성창극단>, 김경애의 <햇님창극단>, 조금앵의 <여성국극협회> 김진진의 <진경여성국극단>, 김재선의 <아리랑여성국극단>, 이정순의 <동명여성국극단>, 문미나의 <송죽여성국극단>, 박정화의 <아랑여성국극단> 등등 그 이외에도 많은 여성국극단들이 활발한 공연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들 국극단 들은 흥행에 따라, 혹은 인기에 따라 대표자의 명의나 소속 단원들의 변동이 잦아 그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당시의 폭팔적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회고담 하나를 소개해 본다. 임춘앵의 대표작품으로 <햇님 달님>, <공주궁의 비밀>, <무영탑>, <목동과 공주> 등이 있었는데, 한번은 <목동과 공주>를 국도극장에 올렸다고 한다. 관중들이 어찌나 몰려들었는지 극장이 있던 을지로 4가 일대가 교통차단이 되어 기마경찰까지 동원이 되었으며 6일 동안 4만 명 이상이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