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정인지, 박연, 최항, 신숙주, 성삼문, 김종서, 최윤덕, 이순지, 김담, 이천, 장영실……
세종시대를 빛낸 인재들, 끝이 없다. 분야를 가릴 것도 없다. 특히 정인지처럼 음악, 언어,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빛을 낸 융합형 인재도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노비 출신 장영실도 있다. 이들이 있었기에 세종은 나라를 다스린 32년간 의료, 음악, 국방, 과학 등 온갖 분야의 업적을 이루었고 당대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세종의 인재 양성은 크게 네 가지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교육, 둘째는 기관과 제도를 통한 인재 양성, 셋째는 인재들의 연구를 장려하고 선진 학문을 배워오게 하는 오늘날의 유학과 같은 해외 파견, 넷째 공동 연구나 협동 작업으로 인한 재능 발휘의 극대화였다. 세종은 인재 양성이야말로 국가 발전의 바탕임을 실제 정책을 통해 실천하고 이룬 셈이다.
인재 양성의 가장 기본이 되는 길은 교육이며 이러한 교육의 바탕은 책이고 책의 바탕은 문자다. 세종 때 이르러 각종 학교(향교, 학당) 제도가 크게 정비 되었고 평민 이상이라면 누구나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더욱이 책을 매우 좋아하고 그 가치와 효용성을 잘 알았던 세종은 《용비어천가》 같은 중요한 책들은 나라에서 펴내 신하들에게 직접 나눠 주었고 백성들이 쉽게 책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둘째, 핵심 연구소이자 자문 기관인 집현전을 크게 일으켜 인재들이 맘껏 연구하고 기량을 펼 수 있게 하였다. 집현전은 임금에게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경연,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 도서의 수집 보관 및 이용, 학문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집현전의 인재들에게는 나라에서 책이 나오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도록 하였다.
▲ 세종 때 집현전을 설치했던 경복궁 수정전
집현전은 고려 인종 때인 1136년부터 있었지만 세종은 1420년(세종 2년)에 집현전을 새로 정비하고 관원을 크게 늘렸다. 훈민정음 반포를 위한 《훈민정음》 해례본(1446) 집필에 참여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강희안은 나중에 집현전 학사가 됨) 모두 집현전 학사였다. 물론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했던 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도 집현전 학사였다.
임금의 경연과 왕세자의 서연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그 당시 집현전이 얼마나 학술 연구와 정치 비중이 큰지를 알 수 있다.
셋째, 특정 인재들에게는 오늘날 안식년(일을 쉬면서 연구에 몰두하게 하는 제도)과 같은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였다. 집현전 학사들에게 주어졌는데 업무에서 벗어나 오로지 독서와 연구만 할 수 있는 특별휴가 제도였다. 세종 8년 때인 1426년 12월 11일의 실록 기록에 의하면, 집현전 학사인 권채, 신석견, 남수문 등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집현전 관리로 임명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열심히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게량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
당대 최고 학자인 변계량의 지도까지 받게 하는 섬세함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돌아가면서 인재들에게 맘껏 연구할 기회를 주었고 훗날 적재적소에서 기량을 맘껏 드러내는 인재들이 된다.
▲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 / 그림 오수민
셋째는 그 당시 중국, 명나라로 유학을 보내 선진 학문을 베워오게 하는 것이다. 집현전을 만든 그 다음 해인 1421년(세종 3년 25세) 남양 부사 윤사웅, 부평부사 최천구, 동래 관노 장영실을 중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 때 세종은 노비 출신 장영실에 대한 사대부들의 눈초리를 염두에 둔 듯 공개적으로 “영실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 너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 라고 일렀다.
또한 많은 비용을 주어 중국의 각종 책과 과학 관련 각종 기관, 기구 등의 도면을 그려오게 하였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10년 뒤인 1430년데 온갖 과학기구가 발명되고 쓰이는 과학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다.
1431년 3월 2일(세종 13년 35세)에는 명나라에 김한, 김자안을 수학공부를 위한 유학을 보내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산법(수학)이란 유독 천문과학책에만 쓰는 것이 아니다. 만약 병력을 동원한다든가 토지를 측량하는 일이 있다면, 산법 없이는 달리 구할 방도가 없다.”
우리가 손말틀(휴대폰) 판매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지만 번 돈의 많은 돈은 다시 미국 쪽 수학자들에게 저작권료로 보낸다. 오랜 세월 동안 수학은 모든 과학이나 실용 분야의 원천임을 강조한 세종의 정신을 이어받지 못하고 수학을 홀대한 탓이다.
이밖에도 세종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공동 연구로 인재활용의 효율성을 높였다. 여러 명의 수재가 힘을 합치면 연구 결과가 극대화되면서도 개인과 공동체는 상생이 됨을 잘 알고 실천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