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_선조40년~1689_숙종15년 ) 선생이 지은 (심곡서원) 강당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 우암 송시열의 강당기(심곡서원 소재) |
선생의 5세손(世孫)으로 지금 삼산부사(三山府使)로 있는 위수(渭叟)군이 제생(諸生)들을 위하여 나에게 기문(記文)을 요구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선생이 우리 동방에 태어 난 것은 마치 염계(濂溪)가 송(宋)나라에 태어난 것과 같다. 어찌 반드시 주고받는 차례가 구슬을 꿰는 것처럼 차서(次序)가 있은 뒤에야 도학을 전하는 것이 되겠는가. 무릇 후인으로서 이강당(講堂)에 오르는 자는 한갓 선생의 용색(容色)과 성음(聲音)만을 상상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선생이 배운 바를 강구(講求)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주돈이(周敦頤: 1017년 ~ 1073년)는 중국 북송(960-1127)의 유교 사상가이다.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존칭하여 주자(周子)라고도 한다. 송나라 시대 유학의 형이상학적 사유는 주돈이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평가되는 분이다. 조선의 주돈이가 곧 정암 선생이란 뜻이다 이어서 강당기 맨 끝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온다.
이 이야기는 정암이 어떻게 문경공과 사제지간이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문경공 환훤당 김굉필(1454-1504)은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서 2년 동안 유배살이를 하였다. 문경공은 유배지에서도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썼는데, 특히 조광조와의 만남은 큰 의미가 있었다. 당시 조광조는 17세 살이었는데, 어천찰방(魚川察訪-영변과 희천의 중간지점 )으로 부임하는 아버지 원강(元綱)공을 따라왔다가, 인근에서 유배 중이던 김굉필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은 성리학자・철학자・정치가이자 시인・작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호는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이다.의정부 좌의정 영중추부사에 이르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2번의 예송 논쟁에서 중심 인물이었다. 제주도에 유배됐으나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 원자 균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진노로 국문을 받으러 오던 중 정읍에서 사사된다. 정조(正祖)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어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고 송자로 격상되고 1707년 송자대전(宋子大全)이 간행된다.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3,000회 이상 언급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후기 서인과 기호학풍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 상현서원, 어철찰방, 한훤당 유배지 옛지도 |
▲ 희천시 지도 |
▲ 보현산과 핵발전소 |
▲ 희천 2호발전소 모습 |
희천 근처에 있는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및 국제 전람관
▲ 보현사와 국제전람관( 김일성 김정은 부자가 받은 선물을 전시하는 장소) |
자강도 희천시 갑현동에 조선노동당 5기계공업총국 예하 핵관련 시설이 있다. 이 시설들은 고농축 우라늄 생산, 플루토늄 생산이나 저장, 고폭시험 실시 등의 의혹을 받고 있다.
▲ 지하 핵시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