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전에 재판 때문에 청주지방법원에 갔을 때에, 재판을 끝내고 우암산 밑의 표충사(表忠祠)에 들러보았습니다. 표충사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충신을 배향하는 사당입니다. 표충사는 바로 이인좌가 난을 일으켜 청주읍성으로 쳐들어갔을 때 반란군에 의해 죽은 충청병사 이봉상과 비장(裨將) 홍림, 영장(營將) 남연년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지요. 충청병사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의 현손(玄孫)입니다. 원래는 3충사라고 했다가, 1736년에 표충사로 사액 받은 것이라고 하네요.
▲ 충청북도 기념물 제17호 <청주 표충사 (淸州 表忠祠)>, 문화재청 제공
그런데 표충사에서 제 눈길을 끈 것은 위 3명의 충신들 보다는 기생 해월입니다. 일개 기생이 표충사에 함께 있다니 이상하지요? 해월은 비장 홍림의 애인으로 해월의 열녀문이 여기에 있습니다. 기생과 열녀라……. 이것도 뭐가 잘 안 맞는 조합 같은데, 실은 비장 홍림이 살해당하자 해월이 홍림의 뒤를 따라 자결을 하였기에 열녀문을 세워준 것입니다. 곧바로 자결한 것은 아닙니다. 홍림이 살해당할 때 이미 뱃속에 홍림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기에, 아이를 낳아 7살까지 키우다가 자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살한 경위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얘기가 전해오네요. 일설에는 아이가 전염병으로 죽자 이를 비관하여 목숨을 끊었다 하고, 다른 설에서는 홍림의 가족들이 자결을 강요하였다고도 하고요. 열녀로 인정되면 가문의 명예가 될 뿐 아니라 나라에서 경제적인 혜택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만약 뒤의 설이 맞다면 참 잔인한 가족들이군요. 사실 열녀로 인정된 여인들 중에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결한 여인네들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열녀가 아니더라도 양반집 여인들은 청상과부가 되어도 가문을 위해 평생을 수절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여인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한 마음씨 착한 시부모의 경우에는 사전 묵계 하에 다른 남자로 하여금 며느리를 납치하여 멀리 멀리 소문이 나지 않는 곳으로 도망하여 숨어 살게도 했다고 하지요. ‘여자를 업어간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구요. 이런 식으로 여자의 정조를 강요하였으니, 정조를 지키지 못한 여인은 당연히 차가운 대접을 받았겠지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의 경우에도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고 집안으로 들이지 않은 양반들이 많았는데, 이 여인들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 여인들(還鄕女)에서 ‘화냥년’이란 말이 유래되었으니, 조선 양반들의 의식 구조가 이 ‘화냥년’에 투영된 것 같습니다.
▲ 청주 표충사에 있는 기생 해월의 열녀각
참 이인좌가 청주 읍성을 점령하는 이야기에는 기생 해월 이외에도 기생 월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월례는 비장 양덕부가 이인좌와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줄 동안 청주목사 박당의 생일잔치에서 청주목의 고관들에게 술을 권하며 잡아놓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이들이 술에 떨어진 것을 확인한 후 반란군에 신호를 보냈다고 합니다. 반란군이 진압된 후 기생 월례의 행적은 나오지 않는데, 당연히 진압군에게 처형당했겠지요?
하여튼 이러한 기생 해월의 이야기에 끌려 표충사를 찾은 것이나, 아쉽게도 표충사의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이런 사당의 경우에는 사전 약속을 하고 가야만 문을 열어주나 봅니다. 할 수 없이 담 너머로 기웃거리다가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수암골 뒷산인 우암산에는 기생 해월의 무덤도 있다고 하는데, 이런 기생의 무덤까지는 친절한 길 안내 표지가 없어 무덤을 찾는 것은 포기하였습니다. 기생 해월(海月)과 월례(月禮). 다 같이 달(月)을 이름에 안고 살던 조선의 두 여인으로 인해 청주가 더욱 친밀감 있는 도시로 다가옵니다.
▲ 조선시대 많은 여성들은 절개를 지켜야한다는 논리에 지아비를 따라 자살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