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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사형제도

[수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20] 사형보다는 종신노역형이 돼야

[그린경제/얼레빗=이규봉 교수]  정치적으로 사형제도가 악용된 경우는 전 세계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해방 이후 사형제도가 어떻게 악용되었는지 시대 순으로 살펴보자 


백범을 죽인 암살범은 백주에 명동거리 , 친일부역자 김창룡을 죽인 암살범을 사형

 

   
▲ 안두희에게 경교장에서 암당당한 백범 김구 선생의 피뭍은 저고리

19496월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원인 육군 소위 안두희는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암살했지만 분명히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당시 특무대장 김창룡 등 그를 비호하는 세력에 의해 특별대우를 받았다. 안두희는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선고 받았으나 15년형으로 곧 감형됐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육군장교로 복직했으며 대령으로 예편했다.  

19561허태영 대령은 특무대장 김창룡을 암살했다. 김창룡은 해방 전에는 만주에서 일본 헌병을 지낸 친일파로 수많은 애국독립투사를 투옥하고 고문한 자였고, 해방 후에는 특무대장으로 이승만의 총애를 받고 정치적인 사건을 조작하고 군대 내에서 군통수권과 지휘권을 유린한 자였다. 안두희와는 달리 허태영은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되었다.  

허태영은 나의 행동은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거사와 같은 것이다라고 주장했으며, 함께 공모한 신초식은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가 백주에 명동거리를 활보하도록 허용하고 있는 이 나라의 법률이 도대체 어떻게 나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항변하였다.  

거의 모든 민중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던 애국지사 백범을 죽인 암살범은 백주에 명동거리를 활보하도록 허용하게 하고 친일부역자 김창룡을 죽인 암살범을 사형에 처한 것은 당시의 정치 논리가 명백히 개입된 것이다. 같은 살인을 저질렀어도 정권의 비호를 받는 자는 살아남고, 정권의 눈에 벗어난 자는 죽은 것이다. 군대를 떠난 이후에도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 등에서 군대에 물건을 납품하는 특혜를 받아 부자로 잘 살았다. 결국 보다 못한 박기서라는 아주 평범한 시민이 반성하지 않는 안두희를 1996년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조봉암 사형, 2007년 재심에서 무죄

   
▲ 조봉암 사형 집행에 대한 당시 신문 기사

1959년 당시 진보당 대표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해방 전에는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였으며 해방 후에는 국회부의장과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냈다. 조봉암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이 저지른 엄청난 부정선거에도 유효투표의 30%에 달하는 215여만 표를 획득하여 이승만의 정적으로 떠올랐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조봉암이 장기집권과 독재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진보당의 강령을 빌미 삼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그를 구속했다.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자 판사들에게 압력을 가해 항소심과 최종심에서 모두 사형을 이끌어 냈다. 재심 청구마저 1959730일 기각되고 다음 날 바로 교수형 당했다. 그는 2007년 재심 청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조봉암은 이미 죽고 없다. 

1961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군부세력은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를 연행했다. 그리고 1031일 사형을 최종 확정하고 집행했다. 그를 사형에 처한 이유는 조용수가 일본에 있는 조총련 자금을 받아 민족일보를 창간하고 무분별한 평화통일론을 주장하여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다. 조용수는 일간신문 민족일보를 발행했다. 그 신문은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신문을 표방하며 평화통일을 주창하였다.  

조용수를 사형시킨 이유는 미국으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의혹 받고 있는 박정희가 그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용수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견해가 있다. 20081월 재심에서 조용수에게 47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이 선고로 그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인혁당 사건 무려 8명 사형,  2007년 재심에서 무죄

197548일 대법원은 시인 도예종 등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하고 국방부는 기습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이른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이다. 인민혁명당 사건은 19744월 군사독재에 맞서 대학생들이 궐기하자 당시 중앙정보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23명을 구속기소했으며 법원은 이 중 8명에게는 사형, 15명에게는 무기징역 및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하루도 안 돼 형이 집행됐다.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1974년 유신반대 투쟁을 벌였던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수사하면서 배후·조종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하고, 이를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 내 지하조직이라고 조작한 사건이다. 그러나 200512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자체 조사결과, 인혁당 사건이 박정희 대통령의 자의적 요구에 의해 미리 수사방향이 결정돼 집행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641차 인혁당 사건 당시 반국가 단체라고 발표된 인혁당은 서클 수준의 단체였으며 수사과정에서 각종 고문이 자행됐다는 점이 인정됐고 2차 인혁당 사건의 중심이었던 인혁당 재건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20071월 서울중앙지법은 사형이 집행되었던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 "18시간만의 사형, '인혁당 재건위' 28년 만의 무좌"라는 한겨레신문 기사

1980년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 당했다. 그는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다. 이른바 1979‘10·26사태이다. 이 사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의 후예들은 박정희로부터 은총을 입은 제2의 권력자가 내부 불만 때문에 배신한 모반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10·26 거사가 많은 국민의 희생을 사전에 막은 정당방위라고 보고 김재규를 의인으로 평가한다. 군사재판에 참여한 변호인단은 모두 김재규에 대한 역사 재평가를 주장하고 있으며 이들은 김재규를 고대 로마시대의 공화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자신의 은인이며 직속상관인 시저를 살해한 브루투스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대통령 한 사람을 제거했다고 밝히고 19805월 광주시민항쟁을 예언했다. 그는 민주화를 지연시키다간 19804월이나 5월 경 국가적 혼란사태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앞선 재심의 결과처럼 시간이 지나다 보면 김재규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갔다.
 

사형제도로 무고한 사람이 사형된다 

사형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앞서 여러 사례를 들었듯이 무고한 사람이 죽는 것이다. 영화<데이비드 게일>이나 <그린마일>을 보면 어떻게 무고한 사람이 사형되었는지 잘 나타난다. 사형제도는 범죄 억제효과보다는 피해자의 감정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다. 사형제도를 실시하는 나라에서 범죄율이 줄어들었다는 통계는 없다. 형제도의 시행과 범죄율 변화 사이의 관계에 관한 2002년도의 유엔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형제도에 대한 의존성을 낮춘다고 해서 범죄율이 갑자기 심각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 준다. 그 이유는 현재 사형폐지국의 범죄 수치가 사형이 폐지되면서 사회 안정에 악영향을 줄 정도로 높아졌다는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경우 10만 명 당 살인율은 19753.09로 가장 높은 수치를 나타내었으나 사형제도를 폐지한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사형을 폐지한 지 27년이 지난 2003년 살인율은 1975년과 비교하여 약 44%가 낮아진 10만 명당 1.73을 기록하는 등 2003년의 강력범죄 발생률이 사형제도가 존재했던 1975년에 비해 44퍼센트나 감소였다. 미국의 경우 2004년 사형제도가 있는 주의 평균 살인사건 발생률은 10만 명당 5.71건이었던 데 반해 사형제도가 없는 주에서는 10만 명당 4.02건이었다.  

사형은 극도로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형벌이다. 사형제도는 인권에 대한 도전이다. 사형은 인간의 생명권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국가에 의한 사법살인에 불과하다. 사형제도가 존속한다고 해도 잔혹한 범죄는 해가 갈수록 더 심해진다. 사형제도의 효과는 분명하지 않지만 문제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각 나라들은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