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규봉 기자] 순정율은 작은 정수에 의한 비가 화음을 이루는 것에 기초해 프톨레마이오스가 피타고라스 음계의 진동수에서 분모와 분자가 두 자리 이상인 경우 약분이 가능한 가까운 수로 다음과 같이 대체했다. 81/64≒80/64=5/4, 27/16≒25/15=5/3, 243/128≒240/128=15/8 따라서 C의 주파수를 1로 했을 때 피타고라스 음계와 순정율의 진동수의 비는 다음 표와 같다. 순정율에서는 도미솔, 솔시레, 파라도 화음은 모두 진동수 비가 4:5:6이 된다. G7화음인 솔시레파의 진동수의 비는 36:45:54:64이나 64를 63으로 바꾸면 이는 4:5:6:7로 간단히 표현이 된다. 보통 사람은 G7화음을 36:45:54:64로 듣기보다는 4:5:6:7의 단순한 정수비로 듣게 된다고 오일러는 주장한다. 순정율에서 C장조의 노래 도도솔솔 라라솔을 한 음 올려 조옮김하면 D장조 레레라라 시시라가 된다. 이때 원곡의 도-솔의 진동수 비는 2:3이나 조옮김한 곡의 레-라는 27:40으로 서로 다르다. 이 차이는 불협화음으로 인식할 정도로 크다. 이처럼 순정율도 조옮김이 불편하기는 피타고라스 방법과 마찬가지이다. 이를 극복한
[한국문화신문 = 이규봉 교수] 2:3과 삼분손익법 삼분손익법은 중국에서 들어온 음률 산정법으로 삼분손일(三分損一)과 삼분익일(三分益一)을 교대로 적용하여 12율(律)을 얻는 방법이다. 이는 중국의 고서인 관자와 율려신서 등, 그리고 조선 성종 때 펴낸 《악학궤범》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종 때 12율을 소리 내는 12율관을 제정했다. ▲ 세종대왕 앞에서 편경을 연주하는 모습의 지음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제공 서양에서는 줄의 길이를 이용했으나 중국에서는 굵기가 일정한 대나무를 사용하여 음의 표준인 황종율관을 정하였다. 이 방법은 기본음 황종이 소리 나는 율관을 기준으로, 그 율관의 길이의 1/3을 빼거나(삼분손일) 또는 더하는(삼분익일) 과정을 되풀이 하여 나머지 11율을 얻는다. 과정 중에 율관의 길이가 기준 율관 길이의 반보다 작아지면 그 전 단계를 한 번 더 시행한다. 기본음을 삼분손일하면 그 길이가 2/3가 되고, 삼분익일하면 4/3이 되므로 삼분손일한 것에 대하여 삼분익일한 것은 그 길이가 두 배가 된다. 따라서 기본음을 삼분손일 한 음은 기본음을 삼분익일 한 음의 옥타브가 된다. 또는 2/3 = 1/2 x 4/3이므로 기본음의 옥타
[한국문화신문 = 이규봉 교수]서양에서는 기원전 3500년 전부터 울림이 좋은 음 간격을 찾아서 조율을 했고, 옥타브 사이의 음들을 적당한 간격으로 나누어 다음 옥타브 위에 반복해 사용했다. 서양음악의 음계를 최초로 체계화 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이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적 원칙을 기본으로 체계적인 조율을 했다. 중국에서는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을 이용하여 음을 생성했다. 음을 생성하는 방법으로 피타고라스 방법이나 삼분손익법은 모두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고 보기보다는 자연의 법칙으로 소리가 발생하는 원리를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이 소리의 원리에 정수비가 포함되어 있다. 2:3과 피타고라스 방법 앞서 설명했듯이 팽팽한 줄을 튕기면 배음들이 함께 나온다. 한 옥타브 내에서 보면 이 음들은 2:3과 3:4 등의 주파수 비로 화음을 이룬다. 피타고라스 조율은 주어진 줄의 길이를 2:3의 비율로 줄이거나 늘리는 방법으로 5도씩 음을 쌓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 두 가지 방법으로 음을 각각 구한 후 서로 비교하여 정수비가 작은 것을 택해 음계를 만든다. 올려쌓는 방법 기준 줄의 길이의 반을 3/2배 늘리고, 또 다시 3/2배 늘리
[한국문화신문 = 이규봉 교수] 정수비와 배음 줄을 튕기면 제일 낮은 주파수인 기본음이 울리며 동시에 그 주파수의 2배, 3배, ... 되는 음들이 함께 나온다. 그러나 첫 음인 기본음의 진폭이 가장 크기 때문에 소리가 가장 크게 울려 이 음만 나오는 것처럼 느낀다. 첫 음을 도라고 하면 주파수가 2배인 음은 옥타브 위 도, 이 음과 그 다음 음은 주파수 비가 2:3이므로 완전5도 위인 솔이 된다, 그 다음 나오는 음은 주파수 비가 3:4이므로 솔보다 완전4도 위인 한 옥타브 위인 도가 나온다. 이러한 음들을 배음이라 하며 악기의 음색을 결정한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음의 주파수 비는 1:2, 2:3, 3:4, 4:5, 5:6 등이 된다. 이 비율이 서양음계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눈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이 대칭구조와 같은 모양의 균형에서 그 근거를 찾듯이 귀는 배음구조라는 음의 균형에서 듣기 좋은 느낌을 갖는다. ▲ 첫 음의 주파수를 1이라 할 때 배음의 주파수와 음계 19세기 헤름홀츠는 이 배음구조를 수학적으로 확실하게 설명하였다. 배음구조의 원음에 가까운 소리들이 서로 어울릴 때는 어울림화음이 되고, 원음에서 멀어질수록 잘 어울리
[한국문화신문 = 이규봉 교수] 수학과 음악은 전혀 다른 학문 분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뜻밖에 유사한 점이 많다. 수학에는 수많은 기호가 사용된다. 이 기호의 뜻을 모르면 수학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뜻을 명확히 알면 많은 내용을 간단하게 함축시킬 수 있어 논리 전개에 크게 도움을 준다. 마찬가지로 음악에도 수많은 기호인 음표가 이용된다. 수학과 마찬가지로 이 음표를 모르면 전혀 악보를 읽을 수 없고 소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뿐이다. 수학과 음악 사람은 감정을 느끼는 오관보다는 지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 어떤 학문보다도 수학이 바로 그러한 이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수학은 자유롭게 사고하며 정신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칸토어도 그래서 ‘수학은 자유’라고 하지 않았나? 음악은 감성적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반해 수학은 이성적이라 할 수 있으니 서로 상반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영국의 수학자 실베스터는 “음악은 감성의 수학이고, 수학은 이성의 음악이다.”라며 상반됨에도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했다. 18세기 프랑스 작곡가 라모도 “음악과 그토록 오래 함께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음악
[한국문화신문 = 이규봉 교수] 무한의 체계를 처음으로 다룬 사람은 19세기의 칸토어이다. 칸토어는 실제적 무한을 이미 완성된 수학적 대상으로 수용했고, 이전까지의 지배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오직 하나의 무한 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무한이 있음을 보였다. 셀 수 있는 무한 무한집합은 자신이 아닌 부분집합과 일대일 대응을 이룬다고 정의했다. 무한인 자연수와 일대일 대응을 맺을 수 있는 모든 집합을 셀 수 있는 집합이라 하고 그 수를 א0로 나타냈다. 자연수와 짝수의 개수는 같다고 했다. 그러면 정수와 자연수는 누가 더 많을까? 정수의 집합을 다음과 같이 나열하자. 0, 1, -1, 2, -2, 3, -3, ... 그렇다면 위의 수는 순서대로 1, 2, 3, 4, 5, 6, 7,...과 일대일 대응을 맺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정수의 개수와 자연수의 개수도 둘 다 무한으로서 서로 같다. 유리수와 자연수는 누가 더 많을까? 유리수란 정수를 0이 아닌 정수로 나눈 수이다. 집합으로 표시하면 {q/p|p와 q는 정수, p는 0이 아닌 정수}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1874년 칸토어는 유리수들이 매우 조밀함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배열하면 수를 셀
[한국문화신문 = 이규봉 교수] 인류가 생긴 이래로 나약한 존재인 인간은 자연의 위대함을 알면서 신에 의지하게 됐다. 강력한 자연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인간은 인간의 능력을 훨씬 뛰어 넘으면서 만물을 지배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찾았고 만들었다. 인간이 처한 자연 환경에 따라 다양한 신들이 존재했다. 기성종교가 생기기 전에는 태양이라든가 동물 또는 자연의 형태를 숭상했다. 성경에 의하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구약성서에 근본을 둔 유대교가 생기면서 신은 오직 한 분이 되었다. 다양한 신을 믿던 사람들에게 오직 신은 하나뿐이라는 유일신 사상이 나타났다. 이것을 이어 받은 종교가 기독교와 이슬람교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무조건 이 말을 믿는 것처럼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서 신을 대할 뿐이다. 신은 존재 하지만 볼 수도 만질 수도 따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종교를 믿든 공통적인 점은 인간은 유한하고 신은 무한하다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은 자신들의 방법으로 신을 대하려 한다. 유한한 인간은 절대 살아서 신을 만날 수 없다. 바벨탑을 쌓아 신에게 가까이 가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인간은 유한
[그린경제/얼레빗=이규봉 교수] 체사레 벡카리아가 말한 한 시민의 죽음이 필요하다고 간주될 수 있는 한 경우로서 한 사람의 죽음이 타인들의 범죄를 억제하는 유일한 방법일 경우를 살펴보자. 과연 사형만이 유일한 방법일까? 인간의 정신에 무엇보다 큰 효과를 끼치는 것은 형벌의 강도라기보다는 그 지속성이라 할 수 있다. 범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억제력은 범죄자가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자유를 박탈당한 채 짐 나르는 짐승처럼 취급받고 자신의 노동으로 그가 사회에 끼친 손해를 속죄하는 인간의 모습을 오래 보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 아닐까? 사형이 주는 인상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급속한 망각의 힘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형을 받을 만한 흉악한 범죄자에게 거기에 합당한 고통을 줄 뿐 아니라 일반시민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게 하는 형벌은 사형일까? 종신노역형일까? 사형은 한 순간에 모든 고통을 집결시키고 종신노역형은 일생에 걸쳐 고통이 분산된다. 오랫동안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것은 순간에 사형을 집행하는 것보다 시민들에게 더 큰 공포를 안겨줄 수 있다. 인간정신은 일시적 고통에 대해서는 전력을 다해 버티어내지만, 장기간 반복되
[그린경제/얼레빗=이규봉 교수]정치적으로 사형제도가 악용된 경우는 전 세계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해방 이후 사형제도가 어떻게 악용되었는지 시대 순으로 살펴보자. 백범을 죽인 암살범은 백주에 명동거리, 친일부역자 김창룡을 죽인 암살범을 사형 ▲ 안두희에게 경교장에서 암당당한 백범 김구 선생의 피뭍은 저고리 1949년 6월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원인 육군 소위 안두희는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암살했지만 분명히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당시 특무대장 김창룡 등 그를 비호하는 세력에 의해 특별대우를 받았다. 안두희는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선고 받았으나 15년형으로 곧 감형됐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육군장교로 복직했으며 대령으로 예편했다. 1956년 1월 허태영 대령은 특무대장 김창룡을 암살했다. 김창룡은 해방 전에는 만주에서 일본 헌병을 지낸 친일파로 수많은 애국독립투사를 투옥하고 고문한 자였고, 해방 후에는 특무대장으로 이승만의 총애를 받고 정치적인 사건을 조작하고 군대 내에서 군통수권과 지휘권을 유린한 자였다. 안두희와는 달리 허태영은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되었다. 허태영은 나의 행동은
[그린경제/얼레빗=이규봉 교수]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자신이 믿는 절대자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그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은 예수라는 인간의 형태로 이 세상에 태어나 그 실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부활한 뒤에는 아직까지는 그러한 일이 없고 단지 재림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디락 델타 함수 (t-t0)는 t0를 제외한 모든 수에서는 0이고 t0에서는 정의되지 않아 그 실체는 볼 수가 없지만, 적분한 값은 항상 존재하므로 그 존재감은 분명히 있다. 따라서 디락 델타 함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는 절대자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함수 g는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을 나타내어 g(t)는 어떤 지점 t에서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여준다. 참다운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자기가 믿는 절대자를 믿고 마음에 품은 것이므로 그 사람 g가 있는 곳 t0에서 신자로서 보여주는 행동은 절대자와 함께 하는 마음으로 (t-t0)g(t)dt이 된다. 그런데 (t-t0)g(t)dt=g(t0)이므로 절대자의 실체는 보이지 않고 그의 행동만 보인다. 곧 절대자는 자신을 믿는 그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