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믄해(천 년)가 지나도 썩지 않는다는 “닥종이”는 “한지”라고도 하는데 닥나무나 삼지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하여 뜹니다. 한지는 붓글씨용으로도 쓰이지만 지승예, 지호공예, 전지공예, 지장공예, 지화공예와 같은 여러가지 공예용으로도 쓰입니다. 그 가운데 지장공예는(紙裝工藝)는 일정한 틀에다 한지를 오려붙여 만든 전통공예품을 일컫지요. 종이만 발라 콩물이나 감물, 옷칠 따위로 마감하기도 하고, 그 위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 마무리하기도 합니다. 작품에는 지장, 함, 서류함, 화살 통, 안경집, 동고리(껍질 벗긴 버들, 싸리채, 대오리, 종이 따위 상자같이 만든 저장용기). 지독(종이를 삶아 짓찧어서 만든 독), 갈모(비 올 때 갓 위에 덮어 쓰는, 기름 먹인 종이로 만든 모자) 그밖에 많은 유물이 있지요. 지장공예의 하나인 종이로 꾸민 지장책장은 조선 문인화에서도 나옵니다. 겸재 정선(1676 ~ 1759)의 그림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지장장식은 당시 양반들이 좋아 하던 것으로 계절에 따라 어울리는 종이를 새것으로 바꾸고, 여기에 그림이나 글씨를 써서
한국인에게 있어서 8월의 의미가 남다르듯 일본인에게 8월의 의미는 남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그를 입증하듯 8월로 접어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세례를 둘러싼 언론과 방송의 보도가 경쟁적이다. 또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현장은 평소보다 많은 일본인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국립 나가사키 원폭사망자 추도 평화기념관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당시의 정황이 적혀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시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한순간에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수많은 시민과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다.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피폭자들에게도 평생 치유될 수 없는 마음과 몸의 상처, 방사선으로 말미암은 건강장해를 남겼다. 우리는 이러한 희생과 고통을 잊지 않을 것이며 이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바친다. 우리는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의 실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후세에 전할 것이며 이러한 역사를 교훈 삼아 핵무기 없는 영원히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할 것이다.” 기념관 안에는 멈춰버린 시계며 원폭 핵심지에서 700미터나 떨어진 이와키마치 초등학교에 다니던 14살 츠츠미양의 시커먼 도시락도 전시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를 준비하고 있는 연변예술대학 교수진들의 환영사를 소개하였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정례적인 우리의 만남이 우리 민족문화 유산을 후손들에게 전승하는 길에서 더욱 공고한 초석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고, 더하여 이러한 교류의 장이 우리의 전통문화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계기가 될 것이 확실하다는 점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류 행사가 시작된 계기는 연변예술대학에서 민족성악을 가르치고 있는 전화자 교수가 어렵게 한국으로 유학을 왔고, 그를 만나면서 연변의 교수들을 소개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교류가 가능해 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전화자 교수는 누구인가? 잠시 소개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1990년 당시, 《국립국악원》에서는 미수교국이었던 중국의 교포인 연변대학의 전화자 교수로부터 한국에 와서 민족성악인 경기민요나 서도민요를 배우겠다는 유학의 뜻을 전달받았다. 그의 내한 목적이 남쪽의 노래를 배워 그의 입신이나 더 큰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연변의 지역민들이나 대학의 제자들에게 남쪽의 소리들을 배워 전해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위 노래는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의 “전우여 잘 자라”는 노래로 한국전쟁 시기에 만들어진 군가 중 가장 유명한 것입니다. 예전 군대에 다녀온 사람치고 담배 한 대에 얽힌 추억쯤 없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군대 졸병 시절 애연가 병사는 화랑담배 나눠줄 때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고된 훈련 뒤에 기합까지 받았던 졸병에게는 이 화랑담배 한 모금이 서러움을 씻어주는 청량제였지요. 훈련 도중 휴식시간이 되면 언제나 조교는 “담배 일 발 장전, 발사”라는 구령을 외쳤고, 졸병들은 입에 문 화랑담배가 꿀맛 같았던 시절이었습니다. 1949년 5월 필터 없는 최초의 군용담배 ‘화랑’이 생산되어 연초비 명목으로 흡연 장병에게는 이틀에 한 갑의 화랑담배를, 비흡연 병사에겐 사탕 한 봉지를 지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 화랑은 1981년 12월까지 무려 32년을 넘는 기간 생산되었는데 이 담배의 생산수량은 무려
장마도 오는 둥 마는 둥 한 뒤 찜통더위는 세상을 점령했고 어제가 입추인데도 더위는 그 위세를 점점 더해갑니다. 밤새 열대야에 시달리고, 낮에는 에어컨 바람에 냉방병에 걸릴 지경이지요. 이러한 삼복더위 속에 휴가도 가지 못한 이들을 위한 그림 하나를 선사합니다. 바로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박연폭포>가 그 그림입니다. 작품의 크기는 세로 119㎝, 가로 52㎝인데 겸재가 그린 진경산수화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진경산수화의 진수라고 평가되는 그림은 《박연폭포》와 함께 《금강전도》, 《인왕제색도》가 겸재의 3대 명작으로 꼽히지요. 특히 이 《박연폭포》는 보는 그림이 아니라 듣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우레소리를 거느린 높이 37m 폭포의 물줄기는 단박에 내리그은 정선의 붓끝에서 세차게 귓전을 때립니다. 특히 길게 과장해서 그려진 폭포수는 그림 아래 개미만큼 작게 그려진 선비와 시동 때문에 크게 대비됩니다. 그 대비는 소리의 크기를 인물의 크기에 견줘서 인간을 압도하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걸어놓은 방은 무더위도 접근할 엄두를 못 낼 것입니다.
“불볕더위가 이 같은데 성 쌓는 곳에서 감독하고 일하는 많은 사람이 끙끙대고 헐떡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밤낮으로 떠오르는 일념을 잠시도 놓을 수 없다. 이러한데 어떻게 밥맛이 달고 잠자리가 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처럼 생각한다고 해서 속이 타는 자의 가슴을 축여 주고 더위 먹은 자의 열을 식혀 주는 데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따로 한 처방을 연구해 내어 새로 약을 지어 내려보내니, 나누어 주어서 속이 타거나 더위를 먹은 증세에 1알 또는 반 알을 정화수에 타서 마시도록 하라” 위는 정조실록 18년(1794) 6월 28일 자 기록으로 정조 임금이 화성을 쌓는 공사장의 감독이나 일꾼들이 더위에 지쳐 몸이 상할 것을 걱정한 나머지 더위를 씻어주는 척서단(滌暑丹) 4천 정을 지어 내려보냈다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24절기의 열세 번째인 입추(立秋)이자 말복(末伏)입니다. 가을로 들어선다는 입추지만 아직 혹독한 말복더위가 대지
-교토 구로다니의 서운원을 연 종엄화상의 발자취를 찾아서- 교토 구로다니 (京都市 左京 黑谷町121)에 있는 서운원(西雲院, 사이운인)이 자리한 금계광명사는 일본 3대 문수도량으로 알려진 정토종 대본산 절로 이 절을 연 법연 (法然, 1133-1212, 호넨) 스님은 전수염불(專修念佛) 스님으로 널리 알려졌다. 전수염불이란 복잡하고 어려운 경전을 파고들기보다는 일심으로 염불함으로써 성불한다는 사상을 실천하는 일종의 염불불교이다. 수은주가 36도를 오르내리는 교토의 더위는 무덥다는 말보다는 살인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정도였지만 더위를 무릅쓰고 7월 15일 구로다니에 있는 서운원을 찾아 나섰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18살의 나이로 조선에서 끌려와 갖은 고생 끝에 큰스님이 되어 일본인들에게 추앙받고 있는 종엄화상(宗嚴和尙, 1575-1628)의 향기가 배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어째서 교토의 구로다니에 조선인 승려 종엄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일까? 《일본전사(日本戰史)》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왜장 오노기시게카츠가 종엄을 1593년 9월 일본군이 퇴각 할 때 끌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 Ⅱ 지난주에는 30여 명의 한국전통음악학회 회원들이 중국 연변예술대학을 방문하여 열네 번째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 교류회를 했다는 이야기와 이 행사는 한국의 전통음악과 중국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동포들이 지키고 있는 음악을 상호 이해하고 서로 교류하는 행사라는 점을 소개하면서 올해의 발표내용과 발표자들을 소개하였다. 이 행사를 준비한 중국의 연변예술대학에서는 강광훈 학장, 신호 부학장, 김성삼 전학부장, 전화자 교수, 중국음악가 협회 박장수 주석, 표현전업의 리훈 주임, 최성룡 교수 등 그 외에도 여러 교수와 학생들이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그 중 리 훈 주임교수의 “중·한 교류음악회의 진정한 의미”라는 제하의 환영사 일부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연변대학예술학원과 한국의 전통음악학회가 매해 여름에 만나 공동으로 개최하는 중한 학술 및 실연 교류회가 벌써 금년으로 14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이번에도 저희 연변대학 예술학원을 찾아주신 한국전통음악학회 회장 서한범 박사님을 위시한 모든 가족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하나 되는 환영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뿌리가 없는 나무에 열매가 맺을 수 없는
땅속에 일곱 해라 무엇을 남겨왔나 나오면 사흘 살곤 목숨을 땅에 곶고 피 타듯 암것 불러서 무엇을 하렸던가 매미는 땅속에 10년쯤 살다가도 땅 위에 나오면 길어도 불과 1주일밖에 못 산다 한다. 왜인지, 대자연의 섭리라 해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