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구로다니의 서운원을 연 종엄화상의 발자취를 찾아서-
교토 구로다니 (京都市 左京 黑谷町121)에 있는 서운원(西雲院, 사이운인)이 자리한 금계광명사는 일본 3대 문수도량으로 알려진 정토종 대본산 절로 이 절을 연 법연 (法然, 1133-1212, 호넨) 스님은 전수염불(專修念佛) 스님으로 널리 알려졌다. 전수염불이란 복잡하고 어려운 경전을 파고들기보다는 일심으로 염불함으로써 성불한다는 사상을 실천하는 일종의 염불불교이다.
수은주가 36도를 오르내리는 교토의 더위는 무덥다는 말보다는 살인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정도였지만 더위를 무릅쓰고 7월 15일 구로다니에 있는 서운원을 찾아 나섰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18살의 나이로 조선에서 끌려와 갖은 고생 끝에 큰스님이 되어 일본인들에게 추앙받고 있는 종엄화상(宗嚴和尙, 1575-1628)의 향기가 배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어째서 교토의 구로다니에 조선인 승려 종엄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일까? 《일본전사(日本戰史)》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왜장 오노기시게카츠가 종엄을 1593년 9월 일본군이 퇴각 할 때 끌고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으로 건너간 종엄은 풍신수길의 정처(正妻)인 기타노만도코로(北政所, 1549~1624, 일명 네네)의 시동(侍童)으로 12년간 지내다가 역시 풍신수길의 가신인 타키가와(川雄利,1543~1610) 집으로 보내진다. 만석꾼 집안의 무장 타키카와에게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이 외동딸의 가정교사로 간 것이다. 그러나 18살이던 외동딸은 종엄을 만난 뒤 얼마 안 돼 병으로 죽고 종엄은 이후 출가의 길을 걷게 된다.
서운원 기록에는 “외동딸이 죽은 뒤 인생무상을 느껴 출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종엄은 어쩌면 18살에 끌려온 뒤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고국산천을 그리다가 출가했을지 모른다. 종엄은 풍신수길 정처 곁에서 보낸 12년과 타키가와 집에서 보낸 1년을 포함하면 인생의 황금기를 속절없이 남의 밑에서 보낸 셈이다. 그 얼마나 갑갑했으랴! 그가 출가 후 훌훌 털어 버리고 정처 없는 운수행각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것도 11년간이나 말이다.
1616년 41살 되던 해 종엄은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교토의 구로다니 동네로 들어와 초암을 짓고 일심으로 염불에 힘썼는데 종엄스님의 기도가 간절한 탓인지 이곳은 염불 소원성취 도량으로 전국에 알려져 그의 문하에는 이름난 제자들과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종엄스님은 이곳에서 12년간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53살 되던 해인 1628년 일본에 끌려온 지 36년 되던 해에 조용히 서운원에서 입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