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를 준비하고 있는 연변예술대학 교수진들의 환영사를 소개하였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정례적인 우리의 만남이 우리 민족문화 유산을 후손들에게 전승하는 길에서 더욱 공고한 초석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고, 더하여 이러한 교류의 장이 우리의 전통문화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계기가 될 것이 확실하다는 점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류 행사가 시작된 계기는 연변예술대학에서 민족성악을 가르치고 있는 전화자 교수가 어렵게 한국으로 유학을 왔고, 그를 만나면서 연변의 교수들을 소개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교류가 가능해 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전화자 교수는 누구인가? 잠시 소개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1990년 당시, 《국립국악원》에서는 미수교국이었던 중국의 교포인 연변대학의 전화자 교수로부터 한국에 와서 민족성악인 경기민요나 서도민요를 배우겠다는 유학의 뜻을 전달받았다. 그의 내한 목적이 남쪽의 노래를 배워 그의 입신이나 더 큰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연변의 지역민들이나 대학의 제자들에게 남쪽의 소리들을 배워 전해 주겠다는 애국 애족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인데,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중국 내 조선족 사회는 북한문화의 절대적인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족 동포들이 부르는 노래는 북쪽에서 배운, 북쪽의 발성이나 창법으로 부르는 노래 일색이었고, 악기 연주에서도 철저하게 북한에 가서 배운 사람들이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야금의 김진 교수였다.
김진 교수는 평양에 가서 월북한 음악가 안기옥이나 정남희로부터 가야금 산조를 배워서 연변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성삼(현 연변대 교수)이나 김계옥(현 중앙대 교수)과 같은 큰 제자들을 길러냈던 것이다.
성악의 전화자도 북한의 노래를 배웠다. 1957년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해서는 평양에서 온 방옥란으로부터 북쪽의 신민요를 전공하였으며 김문자에게는 서도민요나 가곡 등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북한의 성악을 배운 그는 1963년 졸업과 함께 학교의 성악교원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1965년 유일한 조선족 대표로 중앙정부대표단의 일원으로 서장자치구(티벳) 성립 기념공연에 초청되어 우리 전통민요를 열창하므로써 조선족의 명예를 떨치었다. 그 후, 중국의 유명대학인 상해음악학원에서 3년간 중국민족성악을 배워서 새로운 발성법과 창법을 연구, 학생들을 배양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 한ㆍ중 수교가 이뤄지지 않았던 아주 어려운 여건에서 그는 민족의 전통소리를 배우고자 한국 국립국악원으로 유학을 결심하게 되고 한국에 와서는 국립국악원에서 안비취를 비롯한 경서도 명창들에게 소리를 익히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필자가 전화자 교수를 만나게 된 시점도 이 무렵이었다.
나는 그때의 인상을 졸저『추임새에 인색한 세상』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전화자 교수는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두 살 되던 해 부친(전인학)을 따라 중국연변으로 이주해 간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다. 그는 점차 성장하면서 조선족의 전통음악, 그중에서도 특히 서도지방의 민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드디어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해서는 북한의 신민요를 전수받았다.
그 후, 상해음악학원에 진학하여 중국의 민족성악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고 정통의 소리를 지키고 있는 서울로의 유학을 꿈꾸고 있다가 1990년, 드디어 한국에서의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어렵고 힘든 과정을 이겨낸 결과인 것이다. 내가 전화자 교수를 만난 시기는 이 무렵이었다. 어느 날 저녁 집에 오니까 국립국악원의 거문고의 명인 황득주씨가 어떤 여자 손님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손님이 바로 전화자 교수였다. 그는 나를 처음으로 만나 인사하는 자리에서“동무는 무슨 공작을 하고 있습네까?”라고 섬뜩한 인사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녀의 첫 인사말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다음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