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관장 이인숙)은 2017년 봄특별전 <가야, 백제와 만나다>를 오는 5월 28일(일)까지 열고 있다. 서울시의 한성백제박물관과 고령군의 대가야박물관은 ‘유물 및 프로그램 상호교류’협약을 맺은 바 있다. 이 협약에 따라 고령의 대가야박물관이 2016년 9월부터 2017년 2월까지 한성백제박물관 소장유물을 중심으로 <한성백제> 특별전시회를 열었으며, 이번에는 서울의 한성백제박물관이 <가야, 백제와 만나다>특별전시를 여는 것이다. 고구려ㆍ백제ㆍ신라에 묻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려져간 가야는 변한(弁韓)의 후예로서 기원후 1세기에 국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제철기술을 기반으로 백제ㆍ신라는 물론 중국ㆍ일본에까지 철을 수출한 제철강국이었으며 동시에 교역 강국이라고 역사학계는 말한다.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삼한 가운데 하나인 변한에는 12개의 소국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나라들이 발전하여 함께 한 것이 가야연맹이다. 3~4세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전기)연맹체를 이끌었으며, 5~6세기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후기)연맹체를 주도했다. 가야연맹에 속한 국가는 삼국유사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어제(6일, 목요일) 저녁 7시,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 제1관 소강연장에서는 아주 뜻 깊은 강연이 있었다. 올해 윤동주 탄생 100년을 맞이하여 일본 유학도중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국한 윤동주 시인을 기리기 위한 “윤동주 100년 생애전시회(3월 29일~4월 17일)”기간 중 열린 특별 강연이었다. “일본에서 부활하는 윤동주 시인 -일본인들은 어떻게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는가” 라는 제목은 참석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강연은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이 맡았는데 먼저 이 소장은 윤동주 시인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펴고 있는 일본의 다섯 단체를 활동 영상을 통해 소개했다. 이들 단체는 후쿠오카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 (1994.福岡・尹東柱の詩を読む会), 도시샤코리언동창회 (1995.同志社大学コリア同窓会),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 모임 (2008.詩人尹東柱を記念する立教の会), 윤동주의 고향을 방문하는 모임 (尹東柱の故郷をたずねる会)과 2012년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올해 특히 ‘일본,한국,재일코리언시인 공동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집회(日本・韓国・在日コリアン詩人共同ユン・ドンジュ生誕100周年記念集会)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독립운동가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선생의 장례가 우리나라 최초 사회장으로 치러진 날입니다. 당시 서울 인구가 30만이었는데 선생의 사회장에 10만 명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니 선생이 민중들로부터 얼마나 큰 존경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1896년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과 조선교육협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했지요. 몇 차례나 이어진 투옥도 마다 않고 일제에 맞서 민족교육운동을 폈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회장에 취임하여 민족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대감들은 동경으로 이사를 가시지요?” 이 말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한 경술국치가 일어난 직후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이완용, 박제순을 만난 자리에서 이상재 선생이 한 말입니다. 이에 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해를 못하겠다는 뜻으로 쳐다보자 선생은 다시 “대감들은 나라 망하게 하는 데 선수 아니십니까? 대감들이 일본으로 이사 가면 일본이 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라고 조롱했다고 합니다. 선생의 일화 가운데 또 하나는 고종 때의 일입니다. 선생이 고종을 직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남 여수의 흥국사 원통전에는 조선 후기의 불화 보물 제1332호 “흥국사 수월관음도 (興國寺水月觀音圖)”가 있습니다. 비단 바탕에 채색한 것으로 세로 224㎝, 가로 165㎝의 크기입니다. 18세기 최고 화승으로 꼽히던 의겸(義謙) 스님 등이 1723년(경종 3)에 그렸지요. 화기(畵記)에 ‘흥국사관음전상단후불(興國寺觀音殿上壇後佛)’이란 이름과 ‘모든 중생(衆生)이 극락국(極樂國)에 태어나 무량수(無量壽)를 친견(親見)하고 불도(佛道)를 이루기를 원한다.’는 기록이 적혀 있습니다. ▲보물 제1332호 “흥국사 수월관음도 (興國寺水月觀音圖)” 재난과 질병을 막아 주는 관음보살은 백의관음(白衣觀音), 수월관음, 천수관음(千手觀音) 등으로 나뉘는데, 그 자세는 좌상과 입상이 있습니다. 좌상으로 그려진 것은 대부분 수월관음도로, 관음보살과 선재동자(善財童子: 화엄경에 나오는 구도자)로 구성된 형식이며, 글자 뜻 그대로 달이 비친 바다 가운데 금강보석에 앉아 있는 관음보살을 그린 그림이지요. 이 흥국사 수월관음도에는 둥근 몸광배를 하고 있는 관음보살이 화면 가운데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오른 무릎 아래쪽에는 선
[우리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윤동주 시인 탄생 100돌을 맞이하는 올해는 나라 안팎에서 시인을 추모하는 뜻깊은 행사가 열린다. 그 가운데서도 서울 시내 한복판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제1관)에서 3주간 열리는 “윤동주 100년 생애” 특별전이 눈길을 끈다. 이곳에서 전시되고 특별전을 둘러보면 스물일곱 해를 살다간 윤동주 시인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남긴 주옥같은 한글시는 이청옥의 작가의 캘리그래퍼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으며 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과 일본 도시샤대학 유학을 거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져간 모습을 사진과 각종 책자와 기록물들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전시관 오픈갤러리 소공연장에서는 5일(수) 저녁 7시 김순 시인의 시낭송회를 비롯하여 6일(목) 저녁 7시에는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의 “일본에서 부활하는 윤동주 시인 -일본인들은 어떻게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는가?-” 강연이 열린다. 특히 이윤옥 소장은 일본시인들이 주축으로 해마다 도시샤대학에서 열고 있는 ‘윤동주 추모시 낭송 모임’에 참석하는 등 일본 내에서의 윤동주 추모 모임에 적극 관여하고 있다. 한편 4월 17일까지 열리고 있는 “윤동주 100년 생애” 특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나라 토종개인 삽살개는 천연기념물 제368호로 지정되었는데, 신선개 또는 선방(仙尨)이라고 불렀으며, 머리가 크고 털이 길어 사자 같다고 해서 '사자개'라고도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 겨레는 삽살개를 신령스런 동물로 여겼고, 귀신을 쫓는 영물(靈物)로 여겼지요. 또 신라 김유신 장군은 삽살개를 군견(軍犬)으로 싸움터에 데리고 다녔고,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큰 아들인 김교각 스님은 당나라로 떠날 때 삽살개를 데리고 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 삽살개가 조선시대 그림에도 등장합니다. 바로 조선 후기의 도화서 화원 김두량(金斗樑, 1696~1763)이 1743년(영조 19) 6월 초하루에 그린 “삽살개”가 그것이지요. 영조임금이 “사립문에서 밤을 지킴이(柴門夜直) / 네 소임이거늘(是爾之任) / 너는 어찌하여 길에서도(如何途上) / 대낮에도 짖어대느냐.(晝亦若此)”라는 화제를 써줄 정도로 총애했는데 ‘남리(南里)’라는 호도 직접 지어주었습니다. 고개를 쳐들고 입을 벌려 짖는 모습을 옆에서 화면에 꽉 차게 그렸습니다. 활달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이 그림은 개의 표정을 실감나게 그려 마치 컹컹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요. 또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특별시 소속 한성백제박물관(관장 이인숙)은 2017년 봄특별전 <가야, 백제와 만나다>를 3월 30일(목) 오후부터 5월 28일(일)까지 연다. 서울특별시와 경상북도 고령군은 2015년 2월 26일 우호교류협약을 체결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울시의 한성백제박물관과 고령군의 대가야박물관도 ‘유물 및 프로그램 상호교류’협약을 맺은 바 있다. 협약에 따라 고령의 대가야박물관이 2016년 9월부터 2017년 2월까지 한성백제박물관 소장유물을 중심으로 <한성백제>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였으며, 이번에는 서울의 한성백제박물관이 3월말부터 5월말까지 <가야, 백제와 만나다>특별전시를 여는 것이다. 가야는 변한(弁韓)의 후예로서 기원후 1세기에 국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제철기술을 기반으로 백제ㆍ신라는 물론 중국ㆍ일본에까지 철을 수출한 제철 및 교역 강국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삼한 중 하나인 변한에는 12개의 소국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나라들이 발전해 연맹체를 형성한 것이 가야연맹이다. 3~4세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전기)연맹체를 이끌었으며, 5~6세기에는 고령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삼월은 늦봄이니 청명 곡우 절기로다 / 봄날이 따뜻해져 만물이 생동하니 / 온갖 꽃 피어 나고 새소리 갖가지라 / 대청 앞 쌍 제비는 옛집을 찾아오고 / 꽃밭에 범나비는 분주히 날고 기니 / 벌레도 때를 만나 즐거워함이 사랑홉다” 조선 헌종 때 정학유가 지은 가사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3월령의 내용입니다. 청명 곡우 절기에는 만물이 생동하고, 꽃밭에 범나비 날고 기며, 벌레도 즐거워함이 사랑스럽다고 합니다. 오늘은 24절기의 다섯째 절기 “청명(淸明)”으로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뜻을 지녔습니다. 청명 무렵에는 논밭의 흙을 고르는 가래질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논농사의 준비 작업으로 봄밭갈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때는 가래질 말고도 논밭둑 다지기, 보리밭 매기, 푸성귀 씨앗 뿌리기 같은 일들을 하느라 일손 구하기가 힘들지요. 이날 제주도에서는 청명이나 한식은 땅에 있는 신들이 하늘로 올라간 날이어서 특별히 택일(擇日)을 하지 않고도 산소를 돌보거나 이장(移葬)을 해도 좋다고 믿으며, 손이 없기 때문에 집 고치기를 비롯해 아무 일이나 해도 좋다고 믿었지요. 내일은 해에 따라 같은 날이거나 하루 차이로 오는 “한식”입니다. 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이름난 학자들은 거의 한글을 외면했지만 추사 김정희는 평생 40통의 한글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 40통 가운데 며느리에게 보낸 2통을 빼곤 모두 부인 예안이씨(禮安李氏)에게 쓴 것이지요. 추사는 첫째 부인 한산 이 씨가 혼인 5년 만에 죽자 삼년상을 마치고 예안 이 씨와 재혼해서 20여 년을 살았는데 추사는 예안 이 씨를 무척 사랑했으며 이것이 38통의 한글편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추사는 당쟁에 휘말려 20여 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한 까닭에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편지로 썼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제주도로 유배가 있는 동안 쓴 편지는 빠르면 두 달, 늦으면 일곱 달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편지에서 추사는 병약한 몸으로 지아비가 없는 20여 년 동안 효성을 다하고 덕을 쌓은 이 씨에게 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표했고, 이에 이 씨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며 쑥스러워 했다고 하지요. 그런 와중에서 병을 앓던 이 씨는 1842년 11월 13일 세상을 뜨고 맙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11월 14일과 18일 연이어 편지를 보낸 추사는 다음 해인 1월에야 유배지에서 이 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처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교육자이며, 역사학자였던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고 했다. 또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라고 했으며, 일제강점기 선승 만공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 스님으로 시인으로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에 우뚝 섰던 만해 한용운의 흔적은 인제 만해마을과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 등이 있지만 뜻밖에 남한산성에서도 만났다. 바로 남한산성만해기념관이 그곳인데 만해사상연구가인 신구대 전보삼 교수가 자료수집한 것들을 바탕으로 세웠다. 건국공로최고훈장인 '대한민국장'과 만해 생전의 각종 저술과 유물, 3·1운동 당시 만해의 옥중투쟁을 보여주는 신문자료, 희귀본인 「님의 침묵」 초간본 및 100여 종의 「님의 침묵」이본과 만해관련 연구서 등 6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는 뜻을 세우다”, “불교인으로의 지향”, “3ㆍ1운동의 선봉에 서서”, “침묵의 미학”, “설중매화”, “심우장의 정절”, “만해가 떠난 그 후” 따위로 나누어 그의 삶을 정리했다. 주욱 이 순서대로 사진과 설명글을 더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