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임금의 명을 받아 일본의 막부장군(幕府將軍)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사절을 통신사(通信使)라고 합니다. 통신사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모두 20회 일본에 건너갔는데 통신사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도화서 화원 김명국(金明國)입니다. 김명국은 화원으로 두 차례나 일본에 다녀왔는데, 일본에서 꼭 와주기를 요청할 정도로 그의 그림은 인기가 있었다고 하지요. 김명국이 일본에 머무를 때 일화를 보면 참 재미납니다. 한 일본인이 김명국의 벽화를 얻기 위해 세 칸 건물을 짓고 비단으로 장식하여 그를 초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김명국은 먼저 술을 달라 하여 취하도록 마시고 그림 그리라고 준 금물을 벽에 뿜어서 다 비워버렸습니다. 잔뜩 기대한 채 천금을 사례비로 준비하고 있던 그 일본인은 김명국이 벽에 뿜어 그린 그림의 가치를 몰라 칼을 뽑아 그만 김명국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명국의 이 그림은 신묘한 것으로 알려져 일부러 먼 곳에서 이 그림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 정도로 유명한 그림이라고 하지요. 김명국은 술을 좋아하여 여러 개의 호 가운데 하나가 “취옹(醉翁, 취한 늙은이)”였고, 주광(酒狂, 술미치광이)으로도 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2005년 9월 1일 치 신문엔 ”백제인의 얼굴”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 서기 7세기, 토기 바닥에 사람 얼굴을 먹으로 그린 것으로 2002년 발굴한 부여 관북리 연못유적 출토 유물입니다. 백제인의 얼굴은 그동안 토기 조각에 선으로 새긴 것들이 발굴된 적이 있지만, 붓으로 그린 것은 이것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길이 6.2cm 너비 5.8cm로 얼굴 전체를 둥그렇게 표현했으며 눈썹, 코 따위를 대담한 필치로 그린 게 특징이지요. 그런가 하면 그 이전 1995년에 부여 능산리 절터 금당지에서 발굴된 백제인 얼굴도 있었습니다. 기와 조각에 가로 4㎝, 세로 17㎝ 크기로 통통한 얼굴에 너그럽고 천진난만한 모습이 간략한 선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림에 그려진 관 장식이 2개가 있는 관모는 당시 임금만 썼던 것으로, 기와공이 능산리 절터에 행차한 임금을 보고 표현한 것이라고 하지요. 6세기 중・후반 제작된 것이라는 평가입니다. 지난 2012년 국립부여박물관에서는 특별전 “백제인의 얼굴, 백제를 만나다”가 열렸습니다. 이 전시는 서산마애삼존불 등 다양한 유물에 보이는 백제인의 얼굴을 살펴보는 것이었는데 풍족하고 넉넉한 얼굴 표정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나라는 지금 “조류인플루엔자 구제역”으로 큰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조류인플루엔자 구제역”은 “조류독감”이나 영어 약자 “AI”라고 쓰기도 합니다. 이 “조류인플루엔자 구제역” 탓에 우리는 달걀을 사먹기가 참 어렵게 되었습니다. 경향신문은 이를 기사로 쓰면서 “이것 참, 卵감하구나”라고 씁니다. 경향신문은 우리말을 놀잇감의 재료로 쓰려고 한 것인지, 한자와 우리말의 이상한 합성어를 만듭니다. 경향신문은 예전에도 제목에 "대기업이 多 모셔간다."라고 억지로 한자말을 섞어 쓴 적이 있었는데 그에 더하여 “도로가 늘면 로드킬도 는다” 같이 영어도 쓰고, "북 2인자 황병서, 김정은 앞서가다 '깜놀‘"이라고 청소년들이 쓰는 지나친 줄임말도 쓰면서 우리말 헤살하기(해치기)에 앞장 선 듯합니다. 우리나라 대표적 진보 언론이라고 자처하면서 우리말 헤살하기를 밥 먹듯 하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경향신문 편집인의 반성을 요구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마지막 스물넷째로 ‘큰 추위’라는 뜻의 대한(大寒)입니다. 하지만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꼭 소한보다 더 춥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크게 힘쓸 일도 없고 나무나 한두 짐씩 하는 것 말고는 대부분 놀고먹기에 삼시 세 끼 밥 먹기 죄스러워 점심 한 끼는 반드시 죽을 먹었거나 걸렀지요. 또 죽을 먹는 다른 까닭은 양식이 있는 겨울에 아껴서 돌아오는 보릿고개를 잘 넘기려는 의지도 들어 있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대한을 겨울을 매듭짓는 절후로 보아, 대한의 마지막 날 곧 입춘 전날을 절분(節分)이라 하여 계절적 섣달그믐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날 밤을 해넘이라 하여, 콩을 방이나 마루에 뿌려 악귀를 쫓고 새해를 맞지요. 그 절분의 다음날은 정월절(正月節)인 입춘으로, 이 날은 절월력(節月曆)의 새해 첫날이 되지요. 김영현의 소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에 보면 "도시에서 온 놈들은 겨울 들판을 보면 모두 죽어 있다고 그럴 거야. 하긴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으니 그렇기도 하겠지. 하지만, 농사꾼들은 그걸 죽어 있다고 생각지 않아. 그저 쉬고 있을 뿐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가 쓰던 그릇 가운데는 “장군”이란 것도 있습니다. 중두리(독보다 조금 작고 배가 부른 오지그릇)를 뉘어놓은 모양의 것으로 한쪽 마구리(베개, 장구 같은 길쭉한 물건의 양 끝에 대는 것)가 평평하고 다른 쪽 마구리는 반구형(半球形)이며, 배때기에 좁은 아가리를 붙였습니다. 오지로 만든 작은 것에는 물이나 술 따위를 넣지만 큰 것에는 오줌을 담아 지게로 운반합니다. 이를 오줌장군・오줌추마리(경남 창녕)・소매장군(전남 보성)・장군(전남 보성・구례, 강원 강릉) 따위로 부릅니다. 이 장군 가운데는 조선 전기에 상감기법으로 만든 보물 제1400호 “분청사기 상감모란당초문 장군(粉靑沙器 象嵌牡丹唐草文 獐本)”도 있습니다. 장군은 옆면이 완전한 직사각형에 가깝고 양쪽 옆면이 직선에 가까운 완만한 곡면을 이루고 있어서 양감이 크고 듬직하며 무게감이 느껴지는 형태지요. 그뿐만 아니라 입술도 넓고 굵으며 굽다리도 완전한 직사각형으로 넓게 만들어 붙여서 전체는 크고 듬직하며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전면에는 윤곽선이 굵은 모란당초무늬와 조밀하게 찍은 무늬[인화문, 印花文)을 중심으로 가는 상감선을 사용하였는데 굵은 면은 더욱 굵고 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하동에 가면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이며, 관광객이 많이 다녀가는 쌍계사가 있는데 이곳에는 국보 1점, 보물 3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2점 등의 문화재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는 국보로 지정될 만큼 귀중한 문화재인데 887년(진성여왕 1)에 건립되었고, 전체높이 3.63m, 비신높이 2.13m, 너비 1.035m, 두께 22.5㎝의 크기입니다. 탑비의 주인공인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이며, 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고,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임금들의 우러름을 받던 스님으로 77살에 쌍계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탑비는 몸돌이 약간 깨지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비교적 온전한 탑비지요.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 모양이며, 등에는 6각의 거북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가운데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 이름이 새겨져 있지요. 꼭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밥심으로 산다.”는 옛말이 있지만 요즘 우리 국민은 쌀을 얼마나 먹을까요? MBC뉴스에 따르면 먼저 1인당 쌀소비량이 1985년에 128.1kg이던 것이 30년이 지난 2015년엔 절반인 62.9kg으로 줄었습니다. 1인당 하루 소비량을 보면 2010년에 199.6g이던 것이 5년 뒤인 2015년에는 역시 172.4g으로 줄었습니다. 더구나 지난해 이마트의 1월부터 10월까지 매출 견줌에서 쌀은 15.1%가 줄어 순위가 42위로 떨어지고, 대신 빵은 3.1%가 늘어 21위로 올랐습니다. 과연 이렇게 쌀 소비량은 줄고 빵은 더 먹게 되는 현상이 바람직할까요? 한 한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밀가루는 서늘한 음식이기에 흡수가 잘 안 되고, 장에 오래 머물러 있기 때문에 장을 차게 해 좋지 않습니다. 또 밀가루가 기름과 만나면 장에 지방을 많이 끼게 합니다. 그래서 기름과 만난 밀가루는 더욱 피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식은 쌀입니다. 그것은 우리 몸엔 쌀이 잘 맞는다는 말이며, 의학적으로 보면 성질이 따뜻하고, 흡수가 잘 되는 음식입니다.” 한국인들은 주로 쌀과 보리를 먹어오던 오랜 식습관에 의한 결과 장이 서양인들에 견주어 80센티미
[우리문화신문= 일본 사이타마 김영조 기자] "식민지 시대의 창씨개명, 한글금지, 독립운동가 고문 등 우리 선조들의 만행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사죄의 길을 찾고 싶습니다." "일본 내의 민족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민족학교차별을 하는 일본 정부와 투쟁중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정신을 키운 민족교육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실감나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한국의 여성들이 이러한 난관을 극복한 점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이러한 강연을 일본 전역에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사이타마 시민들이 이윤옥 시인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 강의를 듣고 쓴 소감문들이다. 어제(15일) 오후 6시부터 2시간 여 동안진행된 사이타마현 우라와(浦和)커뮤니센터 제7회의실에서 가진 이윤옥 시인의 여성독립운동가 강연은 전날인 14일 고려박물관에서의 강연에 이은 2회째 였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목숨을 건 꽃들의 이야기-조선독립운동에 앞장선 여성독립운동가들-" 이라는 부제로 강연을 한 제7회의실에는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에 관심이 있는 각 시민단체 회원들이 모여 이윤옥 시인의 열띤 강연을 들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공주아리랑보존회 회장 남은혜 명창은 “북간도 아리랑”을 구성지게 불렀고, 이윤옥 시인은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한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라는 시집을 6권이나 펴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서간도와 북간도 나아가 간도는 무엇을 말할까요? 본래 간도는 함경북도 종성(鍾城)과 은성(隱城) 사이의 두만강 중간의 삼각주를 사잇섬 곧 간도(間島)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땅이 매우 기름져 조선 사람들이 건너가 농사를 지었지요. 그리고 그 간도를 나누어 조선 사람들은 백두산 서쪽 지역을 서간도라 했고 두만강 북부를 북간도라 했으며, 그 위쪽 지역을 동간도라고 불렀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이 지역 여진족들이 조선에 조공을 바쳤으며, 청나라가 세워진 뒤에는 조선인들이 많이 건너가 살았습니다. 이후 청나라와 조선 사이 영토분쟁이 있었지만 1902년 대한제국에서는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로 임명ㆍ파견한 뒤 이를 청나라 공사관에 통보할 정도로 분명 조선의 땅이었지요. 그러나 일제가 러일전쟁에서 이기자, 1909년 일본은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일대를 청나라에 넘기는 '간도협약'을 맺어 청나라에 간도지역을 주었습니다.
[우리문화신문= 도쿄 김영조 기자] "강연을 듣고 나서 관람객들이 그림을 대하는 모습이 더욱 진지했습니다. '백문이불여일견' 이라는 말이 실감나듯 강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시된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더라고요. 아쉬운 것은 이번 특별강연 날짜를 전시 막바지에 갖게 된 점입니다. 좀 더 일찍 강연날짜를 잡았더라면 더욱 좋았을 텐데..." 이는 어제(14일) 오후 2시,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열린 "침략에 저항한 불굴의 조선여성들(侵略に抗う不屈の朝鮮女性たち)"에 관한 이윤옥 시인의 특강이 있은 뒤 주최 측인 고려박물관 회원들과의 뒤풀이 자리에서 나온 말이었다. 정말 통쾌한 강연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여성들의 불굴의 의지를 유창한 일본어로유감없이 낱낱이 밝힌 이날 강연은 고려박물관 7층 전시실을 가득 메운 청중들과 2시부터5시까지 무려 3시간 동안 중간 휴식 없이 진행되었다. 다소 긴 3시간이었지만 한국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거침없는 이윤옥 시인의 열띤 강연에 청중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숨을 죽이며 경청했다.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를 경청한 청중들은 자연스레 일제침략의 역사를 새삼 상기한 듯 질의응답 시간에는 20여 명이 다투어"일제침략기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