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농촌진흥청(청장 정황근)은 지난해 기름 벼와 땅콩에 대해 ‘우리 농산물 이름 짓기’를 공모한 결과, 모두 6점의 수상작을 뽑았다. 올해로 7회를 맞은 이번 공모에는 벼 695건, 땅콩 693건 등 모두 1,388건이 제출됐다. 최우수상을 수상한 벼 품종 이름은 향을 뜻하는 ‘아로마(aroma)’와 ‘쌀 (米)’이 합쳐져 향미(香米)를 의미하는 ‘아로미’를 선정했고, 땅콩은 ‘알맹이가 굵고 쓰러짐에 강해 탐나고 실한 볶음땅콩’을 의미하는 ‘탐실’이 뽑혔다. 이들은 모두 새 품종 이름으로 쓸 예정이다. 농촌진흥청 이영희 국립식량과학원장은 “식량 작물 품종 개발 과정에서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이름 공모를 이어나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국민과 소통하면서 친밀하게 다가가는 농업 연구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전했다. 공모 결과는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누리집(www.nics.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최우수상에 뽑힌 “아로미”는 영어에 한자말을 붙여 억지로 만든 말이다. 우리말로도 아름답게 붙여야 의미가 있는데도 이런 억지 이름을 붙인데는 비판이 나온다.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는 “농업진흥청의 결정이 매우 안타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사람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순간까지 항쟁할 것이다. 사형이 아니면 나를 무죄로 석방하라.” 이는 1924년 오늘(1월 5일) 일본 도쿄 한복판 일왕이 사는 황거 앞 이중교(二重橋-니쥬바시, 일명 안경다리)에서 김지섭 의사가 황거를 향해 수류탄 3개를 던진 날입니다. 당시 수류탄의 불발로 거사는 실패했지만 황거를 폭파하려는 조선 청년의 행동에 일제는 놀라워했고 바로 코앞의 경시청 경찰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습니다. 가까운 곳의 사쿠라다몽(櫻田門, 고려문) 곧 황거로 들어가는 문에서는 1931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수류탄 투척이 있었지요. 김 의사는 현장에서 붙잡혀 재판을 받았는데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죽음 아니면 무죄를 주장했기에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지 않겠다.”라며 변호사의 상고를 말릴 정도로 당당했습니다. 그 뒤 복역 중 김지섭 의사는 1928년 2월 20일 뇌일혈로 지바(千葉) 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한국인들도 일왕이 사는 황거를 관광하러 갑니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이중교와 사쿠라다몽 앞에서 우리의 영웅 김지섭과 이봉창 두 의사를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더불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신문은 지난달 26일 경향신문이 “SEOUL CHRISTMAS –Festival 2016-”라고 영어로 커다랗게 쓴 광고를 낸 것에 쓴 소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또 다시 경향신문이 아예 전면에 영어광고를 해 얼굴을 찌푸리게 합니다. 맨 위에 커다란 글씨로 “RENOIR”라고 쓰고 아래로는 “IMAGES OF WOMEN”이라고 달았습니다. 물론 그 옆으로 “르누아루의 여인”이라는 한글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구색에 불과한 느낌입니다. 국어기본법 제14조 제1호에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는 것을 생각 있는 언론기관이라면 지키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요? 제발 영어를 커다랗게 쓰는 것이 품격 있는 일이라는 생각은 버렸으면 합니다. 일제강점기 서정주, 김동리 같은 문인들이 일본에서 천민마을을 얘기하는 일본말 “부락(部落)”을 들여다 동인지 이름 “시인부락”이라고 쓰는 바람에 지금도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부락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인들의 행위가 우리말글을 파괴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世愛牡丹紅 栽培滿院中 사람들 모란꽃을 좋아해 집 안 가득 심지만 誰知荒草野 亦有好花叢 시골 구석구석에는 아름다운 패랭이꽃 무더기 핀다네 色透村塘月 香傳隴樹風 꽃은 연못에 잠긴 달에 비치고, 향기는 바람결에 실려 오누나 地偏公子少 嬌態屬田翁 외진 시골 꽃 찾는 귀인들 적어, 그 자태는 늙은 농부 몫일세 위는 고려 의종 때 문신 정습명(鄭襲明, 미상 ~ 1151년)의 한시 “석죽화(石竹花, 패랭이꽃)”입니다. 모란은 한자 이름으로 목단(牧丹)이라고도 하는데 예부터 한중일 세 나라에서는 부귀와 공명을 뜻하는 꽃이라 하여 “꽃 중의 꽃” 곧 “화중왕(花中王)”으로 불렀습니다. 삼국시대 당태종이 신라 선덕여왕에게 모란이 그려진 병풍과 모란씨 석되를 보냈는데 그림에 모란은 꽃은 화려한데 벌과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다며 짝이 없는 선덕여왕을 희롱한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란은 많은 이의 사랑을 받지만 시골 들판 구석구석 무더기로 피는 패랭이꽃을 귀인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이 꽃을 사랑합니다. 패랭이꽃은 석죽화(石竹花)ㆍ대란(大蘭)ㆍ산구맥(山瞿麥)ㆍ구맥(瞿麥)이라고도 불리는 토종 들꽃으로 낮은 지대의 건조한 곳이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지난해 2014년 9월 14일 서울옥션에서 고서경매가 열렸는데 이때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부인의 차마폭에 두 아들에게 쓴 편지를 모은 서첩)》과 《월인석보》, 《경국대전》 등 귀한 고서적이 출품된 적이 있었습니다. 보물 745호로 지정된 월인석보는 당시 7억3000만원에 낙찰되었지요. 그런데 이 귀한 책이 경매에 나온 것은 지난 2011년 파산한 부산저축은행 김민영 대표가 소장하고 있던 것인데, 파산 과정에서 예금보험공사로 넘겨졌고, 예보가 보관하다 파산 저축은행 피해자들을 위해 경매에 내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월인석보(月印釋譜)》는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본문으로 하고 세조가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설명부분으로 하여 1459년(세조 5)에 펴낸 불경언해서입니다. 《석보상절》의 권수에서 미루어 보면 모두 24권으로 펴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지금 15권만이 전해지지요. 세종과 세조의 2대에 걸쳐 임금이 짓고 펴낸 것으로, 조선 초기 불교문화의 정수라고 평가 됩니다. 또 훈민정음 반포 직후인 1449년에 펴낸 《월인천강지곡》과 1447년에 펴낸 《석보상절》을 10여 년 뒤 세조 때 다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금 해가 새로 바뀌어 낮이 점점 길어지고 양기가 돌아와 만물이 화기를 머금고 있는 이때에 만백성을 위해 자나 깨나 말없이 축원하는 것은 농사가 잘되라는 것이다. (줄임)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고 백성도 나라의 근본이며 백성이 편안해야만 나라가 편안한 법이다. 이것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이치로서 혼연일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나라의 영원한 운명을 비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1791) 1월 1일 치 기록으로 정조임금은 새해 첫날 신하들에게 “백성이 편해야 나라가 편하다.”라고 강조합니다. 이어서 정조는 “농사철을 빼앗지 말고 생업을 흔들지 말며 수시로 살펴서 도와주는 것은 지방관의 직분이고, 볕이 나야 할 때는 볕이 나고 비가 와야 할 때는 비가 와 낮은 데는 습하지 않고 높은 데는 메마르지 않게 되는 것은 나 한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라며 지방관을 독려하고 자신에게도 다짐합니다. 몹시도 어지러웠던 병신년이 가고 정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때 우리는 절대권력을 쥐었던 임금의 다짐을 새삼 떠올려봅니다. 만일 지금의 대통령이 또 그를 보좌하는 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세월은 덧없어 어언간 병신년도 오늘로써 종막(終幕)을 고하고 내일이면 정유(丁酉年)의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해마다 돌아오는 세밑이요 일 년에 한 번씩은 반드시 있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이건만, 이번은 유독히 무엇인가 서글프고 안타까운 심정에 사로잡히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 가 없다.” 이는 “병신년을 보내며”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1956년 12월 31일에 나온 사설 앞부분입니다. 꼭 60년 전 이야기입니다만 지금 병신년 세밑에 돌아보면 역시 같은 심정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사설을 더 읽어보면 “무엇이 우리네 대중으로 하여금 ‘지난 1년도 또 속았구나’ 하는 심정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던가? 정치다. 경제다. 도덕이다. 교육이다. 예술이다. 하는 등등 각양각색으로 우리들은 우리들을 속여 온 제인자(諸因子)들을 더듬을 수 있겠지만 이 모든 인자 중에서 우리들을 속여 온 최대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경제요, 그와 같은 경제를 좌우해 온 정치 그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올 병신년의 화두는 아무래도 “국정농단”일 것입니다. 추운 날씨에도 1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광화문에 모여 대통령 퇴진을 외쳤고, 그렇게 외치게 된 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남 나주시 다도면에 가면 나주 불회사 들머리에 2기의 중요민속문화재 제11호 “나주 불회사 석장승 (羅州 佛會寺 石長栍)이 서있습니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절 들머리에 세워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 구실을 하였지요. 절 앞 300m 되는 지점에서 길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있는 이 장승은 남ㆍ여의 모습으로 구별됩니다. 남장승은 선이 깊고 뚜렷하며 수염이 새겨졌고, 머리 위는 상투를 올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지요. 또 입 가장자리에는 송곳니가 아래로 뾰족하게 튀어나왔고 몸체에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란 이름을 새겼습니다. 여장승은 남장승에 견주어 표정이 온화하고 얕은 선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웃음 띤 얼굴에 몸에는 ‘주장군(周將軍)'-원래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이란 이름이 붙어 있지요. 두 장승 모두 크고 둥근 눈에 두루뭉술한 주먹코입니다. 남장승의 크기는 높이 315㎝, 둘레 170㎝이며, 여장승은 높이 180㎝, 둘레는 162㎝지요. 이 장승이 서있는 불회사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에 세운 절로 높은 산을 뒤로한 협곡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장승의 모습을 얼핏 보면 제주도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이는 나석주(羅錫疇, 1892.2.4~1926.12.28)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공격한 뒤 일경과의 총격전을 하는 과정에서 몰려든 군중을 향해 외쳤던 말입니다. 나석주 의사는 1926년 오늘(12월 28일) 늦은 2시 5분 무렵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식산은행(殖産銀行)으로 들어가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이 폭발은 불발이었지요. 그러자 나 의사는 식산은행(殖産銀行)과 함께 조선의 경제적 착취를 도모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에 폭탄을 던진 뒤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입니다. 나 의사는 일본 경감 다하타 유이지[田畑唯次] 등을 처단한 뒤에 자신이 지녔던 총으로 자결을 시도했지만 중상을 입고 그만 쓰러집니다. 일본 경찰이 곧바로 병원으로 옮긴 다음 이름을 묻자, 자기의 이름이 나석주이며 의열단원임을 밝히고 눈을 감습니다. 식산은행은 일제가 조선에서 신용 기구를 통한 착취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든 은행이며,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기관입니다. 그래서 나석주 의사는 이 두 곳을 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