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시조 추모왕에 대해 제 손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 번 쏘아 백 번 맞추었다.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 하므로 이로써 이름을 삼았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도 신궁이라고 전해지지요. 그렇게 우리나라는 활을 잘 쏘는 명궁이 있었고 이들이 나라를 세우곤 했던 것입니다. ▲ 완성된 전통(箭筒) - 문화재청 제공 그런데 이들 명궁들은 전쟁을 하거나 사냥을 할 때 화살을 화살통에 담아가지고 다녔고 이를 전통(箭筒)이라고도 합니다. 전통은 재료에 따라 대나무로 만든 죽전통(竹箭筒), 종이로 만든 지전통(紙箭筒), 오동나무로 만든 목전통(木箭筒), 상어가죽으로 만든 교피전통(鮫皮箭筒) 따위가 있으며 때로는 조각이나 나전을 써서 그 꾸밈새를 화려하게 한 것도 있지요. 다만, 화살통은 한 번 사면 평생을 쓸 수 있음은 물론 현대에 오면서 일부 소수 애호가들만 화살을 쓰기에 화살통의 수요가 급격히 줄었습니다. 그런데다 화살통은 워낙 세밀한 새김과 꾸밈(장식)이 필요로 해 손이 많이 가는 탓으로 화살통을 만드는 기술을 가진 사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흥인지문에서 청량리까지 간선도로를 “왕산로”라고 합니다. 이 왕산로의 한 빌딩에는 커다란 태극기가 걸려있고, 그 아래엔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구구절절 간절한 기도문을 읽으면서 부끄러워졌습니다. 그 까닭은 “부강한 나라가 되어 세계 열방을 섬기며”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열방”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여러 나라를 가리킵니다. 왜 우리가 부강한 나라가 되어 여러 나라를 섬겨야 합니까? 그렇지 않아도 우리 겨레는 35년 일제강점기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른 나라 섬기는 것에 경기를 할 정도지요. “열강”은 우리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이좋게 지내야 합니다. 영어는 조금만 잘못 쓰면 난리를 치면서 왜 우리말 쓰는 것은 이렇게 소홀한가요? 제발 다른 나라 말보다 우리말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다리 가운데는 무지개 홍(虹) 자를 쓴 홍교(虹橋)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 홍교는 다른 말로 홍예교(虹霓橋)라고도 하고 구른 운(雲) 자를 써서 운교(雲橋)라고도 하며, 우리말로는 구름다리라고 합니다. 이런 다리에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건봉사에 있는 조선시대 무지개 돌다리 보물 제1336호 건봉사 능파교(乾鳳寺 凌波橋)도 있습니다. 이 다리는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로 1704년(숙종 30)부터 1707년 사이에 처음 놓였다고 합니다. ▲ 강원도 고성의 조선시대 무지개 돌다리 보물 제1336호 건봉사 능파교(乾鳳寺 凌波橋) 구름다리는 다리 밑이 반달 또는 무지개 모양을 이루어 그 모양이 아름답고 또한 다리 밑에 기둥이 없으므로 급격히 물이 불어날 때에도 다리가 무너지는 것을 막아주는 장점이 있지요. 이러한 무지개다리는 지금 우리나라에 몇 개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그 가운데서도 능파교는 규모도 크고 보존상태도 좋은 편입니다. 다리의 폭은 3m, 길이는 14.3m이며, 다리 밑 한 가운데 높이는 4.5m이고 밑지름은 7.8m나 되지요. 건봉사 능파교는 단칸 무지개 돌
[우리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강화 고려궁터에는 두 가지 역사가 묘하게 겹치는 곳이다. 고려궁터니까 말 그대로 고려시대 궁궐이 있던 자리여야 하는 데 실제 가 보면 휑한 궁궐터엔 조선시대 외규장각 건물과 강화유수부 동헌이 턱하니 자리하고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역사가 겹치는 것이란 바로 이 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어찌된 사연인가? ▲ 고려궁터에 자리잡은 외규장각 ▲ 외규장각 안에 있던 수많은 조선의 문헌들이 프랑스의 약탈로 강탈당했다. 사진은 외규장각에 전시된 유물 개성에 있어야하는 고려궁궐이 강화로 옮겨오게 된 것은 고려 고종(19년, 1232)이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최우의 권유로 도읍을 송도에서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로 옮겨 온데서 유래한다. 이때 옮겨온 도읍터가 고려궁터로 원종 11년(1270) 개성으로 환도하기 까지 39년간 사용했던 궁궐이며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었고 궁궐 뒷산도 송악이라 했다. ▲ 전상갑 문화해설사가 이곳을 찾은 관람객에게 고려궁궐터에 대한 역사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고려궁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이탁(李鐸)이란 청백리가 있었습니다. 그 이탁이 이조판서를 할 때 그 휘하에는 인사 행정을 맡은 실무책임자(낭관)로 깐깐하기로 소문난 정철(鄭澈, 15361593)이 일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정철은 이탁이 시행하려는 인사 문제에 번번이 어깃장을 놓기 일쑤였습니다. 아니 되옵니다. 그 사람을 이 벼슬에 앉히는 것은 백성의 기대에 맞지 않습니다., 아니야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적절한 인물이네. 이렇게 말했는데도 정철이 꾸며 올린 서류에는 이탁이 뜻하는 사람은 빠져 있곤 했지요. 하지만 이때 이탁은 노발대발하기보다는 어허 그 사람 참 고집도 어지간하구먼. 하면서 아랫사람인 정철의 뜻을 따르곤 했다고 합니다. 이탁은 이렇게 공평한 인사 행정으로 이름난 명관이었는데 대신 그의 집안 살림은 언제나 가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 아랫사람 정철의 인사문제 반대에도 번번이 수용한 이조판소 이탁(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조선 중기의 문신 심수경(沈守慶)이 쓴 이탁의 비문에 공은 재물을 가볍게 여겨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고아를 어루만져 주고 과부를 구휼하고 혼인할 돈을 도와주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사)한국형리더십개발원에서는 새해 병신년에도 지난해처럼 세종달력을 판매합니다. 그런데 달력 한 가운데 큰 글씨로 後日之效라고 써놓았습니다. 물론 後日之效란 《세종실록》 19년 8월 6일에 나오는 세종의 말로 큰일을 이루려면 처음에는 반드시 순조롭지 못하더라도 뒷날 공 들인 보람이나 효과는 반드시 클 것이다.라는 좋은 말이지요. 그러나 세종대왕의 상징은 무엇입니까? 세종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절대군주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백성과 소통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 아닌가요? 특히 세종은 1449년(세종 31)에불교 찬가(讚歌)《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펴내면서 한글을 한자보다 훨씬 크게 써낸 분인데 그런 임금의 이름을 걸고 내놓는 달력의 얼굴이 한자라면 지하에서 세종이 땅을 칠 것입니다. ▲ 세종이 1449년(세종 31)에 지은 불교 찬가(讚歌)《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보물 제398호, 대한교과서(주) 소장 아무리 달마다 세종어록을 수록했어도 24절기 가운데 12개 대표 절후는 특별히 세종대에 편찬된 《칠정산내편》의 구절을 썼어도 제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선비의 품격이 담긴 간결함의 미학, 할아버지의 거처에서 칠기류의 화려한 가구는 찾아볼 길이 없었다. 오래된 경상과 쌍문갑은 오로지 사람이 문질러서 광택이 생긴 것일 뿐 모서리에 철 장식 한 조각 붙어 있지 않았다. 방 귀퉁이에 놓인 사방탁자도 문구 이상의 것은 없었다. 집 안에 청화백자가 화분처럼 흔하게 널렸건만 할아버지의 침소에는 한 점도 들여놓지 않았다. 저녁이면 낡은 감색 방석과 경상을 한쪽으로 치운 후 반침(半寢)을 열고 이부자리를 내렸다." 위 글은 심윤경 작가의 소설 달의 제단 가운데 나오는 내용입니다. 안방의 보료(안방이나 사랑방 등에 방치레로 항상 깔아두었던 요) 옆이나 창 밑에 두고 문서·편지·서류 따위의 개인적인 물건이나 일상용 기물들을 보관하는 가구가 바로 문갑(文匣)이지요. 문갑은 형태에 따라 책상을 겸한 책문갑(冊文匣)이 있으며, 장식공간이 많은 난문갑(亂文匣), 중국식 문갑을 말하는 당문갑(唐文匣)으로 나뉘기도 하고, 하나만 쓰는 외문갑과 쌍으로 쓰는 쌍문갑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 두 개가 한 벌을 이루는 쌍문갑(雙文匣) 쌍문갑(雙文匣)은 두 개가 한 벌을 이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 전승되고 있는 탈놀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양주별산대놀이(楊州別山臺─)가 있습니다. 이 <양주별산대놀이>는 경기지방에서 연희되어 온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나눔으로서, 서울의 녹번(碌磻)·아현(阿峴) 같은 곳의 본산대(本山臺)와 같지요. 그러나 본산대는 지금 전승되지 않고 있어서 이 <양주별산대놀이>가 경기지방의 대표적 탈놀이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 놀이는 사월초파일과 단오ㆍ한가위에 주로 연희되고, 크고 작은 명절은 물론 가뭄 때의 기우제(祈雨祭) 행사로 연희되어 왔지요. ▲ 양주별산대놀이 탈바가지들, 경기도박물관 <양주별산대놀이>의 내용은 파계승(破戒僧),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 하인들이 등장하여 현실폭로와 풍자·호색(好色)·웃음·탄식 등을 보여줍니다. 특히 제3과장 “옴중과 목중”에서 옴중은 옴벙거지로써 자신의 지체를 높이려 하나 결국 옴이 오른 중임이 발각난다는 내용으로, 파계승에 대한 풍자가 주된 내용입니다. 또 제4과장 “연잎과 눈끔적이”에서는 초월적 능력을 가진 고승 연잎과 눈끔적이가 나타나 파계승 옴중과 목중을 벌합니다. 제7과장 제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 거리다 잠이 든다." 위 글은 1935년 12월 잡지 《조광》에 백석이 발표한 작품입니다. 시인이 명절날 ‘여우난골’에 있는 큰집에서 있었던 모습들 특히 아이들이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게 놀이하던 모습이 토속적이면서도 서정적인 표현을 통해 질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지금은 잊힌 아이들의 많은 놀이들을 얘기합니다. 쥐잡이, 굴금막질(숨바꼭질), 꼬리잡이, 장가가는 놀음은 물론 바리깨돌림(주발 뚜껑을 돌리며 노는 놀이), 호박떼기(말타기와 비슷한 놀이), 제비손이구손처럼 지금은 잘 알지 못하는 놀이들이 소개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시대를 막론하고 사창가는 있었습니다. 때에 따라 모양새는 다르지만 조선시대는 기방이 사창가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일부 기생은 정조를 지키고 한 사람만을 사랑하기도 했지요. 원래 기생은 관비였습니다. 당시 지방관들은 부임할 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솔들을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만일 가솔을 데려가면 그 지방 백성들을 어렵게 한다는 까닭에서였지요. 그러나 홀로 임지에 간 지방관들은 시중을 들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 역할을 했던 이들이 바로 관기였던 것이지요. 이런 관기들도 일부는 한양에 올라와서 혜민서에 의녀로 일하거나 상의원에서 침선비로 바느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나라에서 경제적 지원을 해주지 않았기에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기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기녀들에게 생활비를 대주고 살 집을 마련해주면서 그녀들이 웃음과 몸을 팔아서 돈을 벌게 했고, 그 번 돈을 나눠 가지는 필요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조방꾼이란 사람들이었습니다. ▲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첩 가운데 유곽쟁웅(遊廓爭雄), 기방 앞에서 붉은 철릭을 입은 별감이 싸움을 말리고 있다. 이들을 기부라고 부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