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임금과 왕비가 온수현으로 가니, 왕세자와 종친과 신하 50여 명이 따랐다. 임영대군 이구, 한남대군 이어에게 궁을 지키게 하고, 이 뒤로부터는 종친들에게 차례로 왕래하게 했다. 임금이 가마골에 이르러 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 이 행차에 처음 기리고(記里鼓)를 쓰니, 수레가 1리를 가게 되면 나무인형이 스스로 북을 쳤다.” 위 내용은 《세종실록》 23년(1441년) 3월 17일 기록입니다. 여기서 온수현은 지금의 온양인데, 세종이 왕비, 왕세자와 더불어 온천에 가는 길이었고, 이때 처음 “기리고차”란 것을 썼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리고차는 일정한 거리를 가면 북 또는 징을 쳐서 거리를 알려주던 조선시대 반자동거리 측정 기구입니다. 장영실이 중국식 기리고차를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개량하였는데, 각 도, 각 읍 간의 거리를 조사하여 지도를 작성하는 데 기리고차가 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문종 1년에는 제방공사를 하는 데 있어 기리고차를 이용하여 거리를 재었다는 기록이 있어 토목공사에서도 널리 쓰였을 것입니다. ▲ 국립과천과학관에 국내 최초로 복원 전시된 기리고차의 모습 ▲ 옛 문헌에 기록된 기리고차 모습(왼쪽), 기리고차를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미국인 벨이 발명한 전화는 우리나라엔 1890년 무렵 궁궐 안에 처음 설치되었습니다. 고종은 당시 이 전화를 적극 이용했는데 특히 동구릉에 있는 대비 조씨의 무덤에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해 문안을 드릴 정도였지요. 또 고종은 신하들이 친러파와 친일파로 나뉘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임금이 내린 지시도 왜곡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을 극도로 불신하면서 칙령도 덕률풍(德律風. 텔레폰의 음역)으로 내렸습니다. 그런데 고종이 전화를 하면 전화를 받는 신하는 임금을 직접 뵈었을 때처럼 극진한 예를 다했지요. 먼저 전화벨이 울리면 신하는 전화기가 있는 방향으로 절을 세 번하고 전화를 받아 임금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소리로만 들리지만 전화기를 임금으로 생각하고 삼배(三拜)의 예를 다했던 것이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전화는 철선(鐵線)을 쓴 탓에 감도가 아주 나빠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전화기가 있는 방 안 사람들은 모두 일손도 멈추고 숨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 우리나라에 처음 놓은 전화, 임금에게서 전화가 오면 절을 하고 받았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고종의 전화 덕에 목숨을 구한 이도 있었는데 바로 김구 선생입니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서울(도읍지 금성, 현재 경주) 밝은 밤에 밤늦게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도다. 둘은 나의 것이었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오?” 이 노래는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 “처용가" 입니다. 이 처용가를 바탕으로 한 궁중무용 “처용무(處容舞)”가 있습니다. 처용무는 원래 궁중 잔치에서 악귀를 몰아내고 평온을 비손하거나 음력 섣달그믐날 악귀를 쫓는 의식인 나례(儺禮)에서 복을 빌면서 춘 춤이었지요. ▲ 남자들이 오방색 옷을 입고 추는 처용무(문화재청 제공) 《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 조에 보면 동해 용왕(龍王)의 아들로 사람 형상을 한 처용(處容)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천연두를 옮기는 역신(疫神)으로부터 인간 아내를 구해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그 설화를 바탕으로 한 처용무는 동서남북 그리고 가운데의 오방(五方)을 상징하는 흰색·파랑·검정·빨강·노랑의 옷을 입은 5명의 남자들이 추지요. 처용무의 특징은 자신의 아내를 범하려는 역신을 분노가 아닌 풍류와 해학으로 쫓아낸다는데 있습니다. 춤의 내용은 음양오행설의 기본정신을 기초로 하여 악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정선 노추산은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입산수도 하여 화엄종을 이루었으며, 설총이 수도 하면서 이두(吏讀)를 창안하였고, 공자와 맹자를 기리기 위하여 공자가 살던 노(魯)나라와 맹자의 고향인 추(鄒)나라의 이름을 따서 노추산이라고 했다고 전해지는 산입니다. 율곡 이이 선생이 이 노추산(魯鄒山) 이성대(二聖臺)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일입니다. 어떤 도사가 지나가다 율곡의 관상을 보더니 호랑이에게 죽을 팔자여서 살려면 밤나무 1,000그루를 심어야 한다고 했지요. ▲ 잎과 열매가 밤나무를 닮은 "너도밤나무"(왼쪽), 잎과 열매가 전혀 다른 "나도밤나무" 그래서 율곡이 밤나무를 심었고, 뒷날 도사가 다시 찾아와 밤나무를 셌습니다. 그런데 두 그루가 모자라는 998그루여서 도사가 호랑이로 변해 율곡을 잡아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어떤 나무가 “나도 밤나무요”라고 소리쳤습니다. 호랑이는 “그래도 한 그루가 모자라지 않느냐”고 호통치자 나도밤나무가 옆에 있는 나무에게 “너도 밤나무잖아”라고 외쳐서 살 수가 있었다는 재미나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도사를 속여 율곡을 살렸다는 나도밤나무와 너도밤나무는 사실 밤나무가 아니지요. 다만, 너도밤나무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한국의 문화재 정책을 아우르는 문화재청은 매달 《문화재사랑 》이라는 잡지를 펴냅니다. 그런데 2015년 2월호 《문화재사랑 》에 실린 한글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백제문화의 포용의 정신과 백제금동대향로의 창조성이란 제목에는 일본말투인 ~의 토씨를 연속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대로 쓰려면 백제문화의 포용정신과 백제 금동대향로의 창조성이라고 쓰는 게 맞는 것이지요. 좋은 글을 쓰려면 ~의를 가능한 자제하는 게 좋은 것인데도 이렇게 ~의를 마구 쓰는 것은 왜 그럴까요? 참고로 ~의를 빼고도 뜻이 통한다면 과감히 ~의를 빼는것이 더욱 우리말다운 글이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도 글쓴이와 편집자의문제가 또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배층은 북쪽 고구려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다. 만주와 유라시아의 기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고구려에 막혀 북으로 진출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라며 하지만이란 어찌씨(부사)를 앞뒤 월(문장)에서 거듭 쓴 것입니다. 글쓴이가 잘못 썼더라도 편집자가 주의를 기울여 고쳐줬어야 하는데도 이런 글이 나온다는 것은 《문화재사랑 》의수준이문제가 있음을얘기하는 것입니다. 개인 문집도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세 번째 절기 “경칩”으로 겨울잠을 자던 벌레들이 나온다는 날입니다. 중국 후한시대 반고가 쓴 역사서 《한서(漢書)》에 보면 원래 열 계(啓)자와 겨울잠을 자는 벌레 칩(蟄)자를 써서 계칩(啓蟄)이라고 했었는데 뒤에 한 무제의 이름인 계(啓) 자를 쓰지 않으려고 놀랠 경(驚)자를 써서 경칩(驚蟄)이라 하였습니다. 《태종실록》 15년(1415) 1월 4일 치 기록에 충청도 도관찰사 정역(鄭易)이 보고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생(生)을 좋아하고, 사(死)를 싫어함은 사람과 사물들이 같습니다. 전(傳)에 말하기를 ‘갓 나온 벌레는 죽이지 않고, 갓 자라나는 풀은 꺾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이제 무지한 농부들이 경칩으로 만물이 소생하는 때를 당하여 불을 놓아 전답을 태우는데 산과 들에까지 연소되어, 드디어 모든 벌레가 다 타죽게 만드니,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이것도 또한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한 가지 일이니, 원컨대 이제부터는 경칩 이후에 방화함을 일절 모두 엄하게 금지하소서.” ▲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깨어나는 경칩(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정월 명절로는 설과 대보름이 있다. 옛 풍속에는 대보름을 설처럼 여겼다. ≪동국세시기≫에 대보름에도 섣달 그믐날의 수세하는 풍속과 같이 온 집안에 등불을 켜놓고 밤을 지새운다는 기록이 보인다. 정월대보름 달은 한 해 가운데 달의 크기가 가장 크다. 가장 작은 때에 견주어 무려 14% 나 커 보인다는데, 그것은 달이 지구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는 정월대보름의 달이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탓에 작은 달이 될 것이란 예상이다. ≪동국세시기≫에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하는 것을 ‘망월(望月)’ 이라 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에게 행운이 온다.”라고 나와 있다. ▲ 정월대보름 초저녁에 뒷동산에 올라 달맞이를 한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우리나라는 농사를 기본으로 음력을 사용하는 전통사회였다. 음양사상(陰陽思想)에 따르면 해를 '양(陽)'이라 하여 남성으로, 달은 '음(陰)'이라 하여 여성으로 본다. 달의 상징적 구조를 풀어 보면 달-여신-땅으로 표상되며, 여신은 만물을 낳는 지모신(地母神)으로 출산하는 힘을 가진다고 한다. 따라서 달은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약밥, 오곡밥, 귀밝이술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늘은 정월대보름으로 옛 풍속에는 대보름을 설처럼 여겼습니다. 이렇게 명절의 하나였던 정월대보름에 먹는 명절음식으로는 오곡밥과 갖은 나물, 약밥, 복쌈, 진채식, 귀밝이술 따위가 있지요. 약밥은 찹쌀에 밤, 대추, 꿀, 기름, 간장을 섞어서 함께 찐 뒤 잣을 고명으로 섞어 보기 좋게 내놓는데 지방에 따라 오곡밥, 잡곡밥, 찰밥, 농삿밥으로 대신하기도 합니다. 특히 한방에서 오곡밥은 오색이 모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오장육부를 조화시키고 각 체질에 맞는 음식이 골고루 섞여 있는 조화로운 음식이라고 하지요. 오곡밥 가운데 찹쌀은 소화기를 돕고 구토, 설사를 멎게 하며, 차조는 비위(脾胃)의 열을 제거하고 소변을 잘 나오게 하는 동시에 설사를 멎게 하며, 차수수는 몸의 습(濕)을 없애 주고 열을 내려 준다고 합니다. 또 콩은 오장을 보하고, 십이경락의 기혈 순환을 도우며, 팥은 오줌을 잘 누게 하여 부기, 갈증, 설사를 멎게 합니다. 그밖에 복쌈은 밥을 김이나 취나물, 배추잎 따위에 싸서 먹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복쌈은 여러 개를 만들어 그릇에 노적 쌓듯이 높이 쌓아 성주님께 올린 다음에 먹으면 복이 온다고 믿었지요. 또 진채식은 고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충남 청양군 정산면 송학리에는 해마다 음력 정월 열나흘날 마을주민들이 모여 청양정산동화제 (靑陽定山洞火祭)를 지냅니다. 청양동화제는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하던 화전(火戰)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지며 칠갑산을 중심으로 정산면 일대에서 하던 마을잔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잠시 중단된 채 마을에서 간신히 제사만 지내오다가 1987년 정산면 송학리에서 다시 발굴하여 민속놀이로 자리잡게 되었지요. 청양정산동화제는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무형문화재제9호로 지정받은 문화유산입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정월 열나흘 저녁 무렵 마을 사람들이 정성들여 목욕재계하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씩 베어옵니다. 그리고는 베어 온 나무로 동화대를 세우고 달이 뜨길 기다려 마을신에게 제사를 올리지요. 이 때 국태민안과 세화풍년(歲和豊年)을 기원하며 모든 부정하고 더러운 것을 불에 태워 액운을 제거하고 평안을 빌게 됩니다. 이렇게 마을제사를 마치고 나면 모든 부정한 것은 불에 태워 액운을 제거하고 제사가 끝나면 주민들이 한데 어우러져 준비된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흥겹게 놉니다. 이때 지게가마타기, 휘장돌기 따위를 하며 부르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누에들은 배가 고파서 모가지를 높이 쳐들어 내두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손에 뽕잎을 듬뿍 집어서 확 뿌려 주었다. 누에들은 좋아라고 뽕잎을 소나기 소리를 내면서 먹었다.” 이는 이광수의 <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뿐만 아니라 “뽕 따러가세. 정든 임 따라서 뽕따러 가세. 얼씨구나 좋다. 절씨구나 좋다. 정든 임 따라서 뽕따러 가세. ”와 같은 아산지방 민요에서 보듯이 누에치기는 예부터 여성의 노동과 관련지어 나타납니다. 누워있는 벌레라는 뜻의 누에는 중세어형은 “누웨 누에”였으며 예전의 누에치기는 국가재정과도 관련 되는 것으로 궁중에서는 왕비가 손수 누에를 쳤던 친잠단(親蠶壇)이 경복궁에 남아있습니다. 또한 누에의 넋을 달랜 선잠단(先蠶壇)도 성북동에 있으며 남산의 서쪽 끝이 누에머리처럼 생겼다해서 잠두(蠶頭)라 하고 뽕나무를 많이 심었지요. 특히 세종대왕은 누에를 키우는 일을 크게 장려했는데, 각 도마다 좋은 장소를 골라 뽕나무를 심도록 하였으며, 중종 원년(1506)에는 여러 도에 있는 잠실을 한양 근처로 모이도록 하였는데 지금 강남 잠실이 바로 옛 잠실(蠶室)들이 모여 있던 곳입니다. ▲ 뽕잎을 먹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