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허물을 벗는다 - 이창년 허물을 벗는다 매미도 벗고 뱀도 벗고 우리도 벗는다. 허물을 벗으면 달라지는 게 있지 그렇게 우리도 달라지겠지 초승달이 보름달 되듯 보름달이 그믐달 되듯 어제가 오늘과 다르듯이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라고 그러나 묵은 세월이 주저앉은 너와 나는 별반 달라진 게 없구나 아니야 엄청 달라졌지 그동안 측은지심이 많이도 자라서 키를 재고 있는걸. 허물을 벗지 않는 파충류는 파멸한다고. 한다. 허물을 벗는 동안 엄청난 고통의 시간이겠지만 말이다. 애벌레가 어른벌레가 되려면 하나의 통과의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허물벗기는 파충류뿐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얘기다. 사람이 숨을 쉰다는 것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인데 낡은 사고를 버리지 않고 숨을 쉬고 있다면 그건 화석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본인이야 깨닫지 못한 채겠지만... 그래서 나이 먹은 이들이 젊은 친구들에게 ‘꼰대’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렸다. 물론 사람 모두가 최첨단을 향해 허물을 벗으려고 발버둥을 칠 필요는 없다. 하루 먹기 바쁜 일반 대중이 목숨 걸고 새로움을 추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삶 속에서 각자의 허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백범은 흉탄에 쓰러지고/ 단재는 수문랑(하늘의 벼슬)으로 멀리 갔네/ 가련한 손, 홀로 남은 심산 노벽자(늙은 앉은뱅이)/ 여섯 해 동안 삼각산 아래 몸져누웠도다.” 이 시는 심산 김창숙 (1879~1962) 선생이 병상에서 백범 김구와 단재 신채호 선생을 기리며 쓴 시입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으려고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 (1905)이 단행되자 스승 이승희와 대궐 앞으로 나아가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시작으로 1960년 4·19 직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의장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민족운동사 중심에 서 계셨던 분입니다.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자 130여 명의 뜻을 모아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등 해방이 되기까지 나라 안팎에서 독립운동의 맨 앞에서 뛰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수많은 사람 가운데 독립, 통일, 민주화 운동을 통틀어 심산 김창숙 선생을 따를 만한 이가 없다는 평을 받을 만큼 불굴의 정신으로 일관한 선생은 독립운동에 두 아들을 바치고 선생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를 못 쓰는 앉은뱅이가 되어 누울 집 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95년 전 오늘(8월 25일)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문학가로 꼽히며, 단편소설 <벙어리 삼룡이>를 쓴 나도향(羅稻香, 1902~1926)이 세상을 뜬 날입니다. 그의 대표작 <벙어리 삼룡이>는 1925년 '여명(黎明)' 창간호에 처음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은 1인칭 서술자 ‘나’가 등장, 15년 전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액자 소설의 형태를 지니고 있지요. 신분주의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벙어리라는 결정적 아픔을 지닌 삼룡이가 상전 아씨에게 연모의 정을 품으면서 어쩔 수 없이 반항으로 전환되는 갈등 이야기입니다. 초기의 낭만적 감상주의를 극복하여 인간의 진실한 애정과 그것이 주는 인간 구원의 의미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나운규 감독이 1929년에 영화화했고 1964년에는 신상옥 감독이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화했지요. 나도향은 이상화, 현진건,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파’라는 낭만파 활동을 했으며, 《백조》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후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 <환희>, <옛날의 꿈은 창백하더이다> 등을 발표합니다. 또 19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7월 8일 문화재청은 경복궁 동궁의 남쪽 지역에서 현대 정화조와 비슷한 시설을 갖춘 대형 화장실 유구(遺構)가 확인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경복궁 화장실은 왕세자가 거처했던 동궁과 관련된 하급 벼슬아치와 궁녀, 궁궐을 지키는 군인들이 주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문헌자료에 따르면 화장실의 규모는 4∼5칸인데, 한 번에 많게는 10명이 썼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 발굴된 화장실의 구조는 길이 10.4m, 너비 1.4m, 깊이 1.8m의 좁고 긴 네모꼴 석조로 된 구덩이 형태로 정화시설 내부로 물이 들어오는 입수구(入水口) 1개와 물이 나가는 출수구(出水口) 2개가 있습니다. 유입된 물은 화장실에 있는 분변과 섞이면서 분변의 발효를 빠르게 하고 부피를 줄여 바닥에 가라앉히는 기능을 하였고 분변에 섞여 있는 오수는 변에서 분리되어 정화수와 함께 출수구를 통해 궁궐 밖으로 배출되었지요. 이렇게 발효된 분뇨는 악취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독소가 빠져서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이 구조는 현대식 정화조 구조와 비슷하다고 하지요. 한국생활악취연구소 이장훈 소장에 따르면 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유구국(琉球國, 류쿠국)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가깝다. 어떤 사람은 맑은 날이면 한라산에 올라 유구의 산빛을 볼 수 있다 하였다. 그렇게까지 가깝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 정남쪽 바다 한가운데에 있고, 달리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없는 땅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왕래하는 일이 없다가 고려말 창왕(昌王) 원년(1389년)에 이르러 경상도 원수 박위에게 대마도를 공격하게 하자 유구의 중산왕 찰도가 소식을 듣고 신하 옥지를 보내 표문을 올리고 신하를 자칭하였다.” 위는 조선의 실학자 정동유가 조선의 역사문화와 자연환경, 풍속과 언어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고증하고 분석하여 백과사전처럼 엮은 책 《주영편(晝永編)》에 나오는 유구국 곧 지금의 오키나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때 유구국 신하는 왜구의 노략질로 붙잡혀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유황, 소목(蘇木, 한약재), 후추, 갑옷 등을 바쳤습니다. 유구국 곧 류큐왕국은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한 류큐 제도 일대에 있던 나라입니다. 13~14세기에 류큐 제도 일대에 형성되었던 지역 세력들이 15세기 초 통일 류큐왕조를 세우면서 독립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이후 명나라, 조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14번째인 처서(處暑)입니다. 여름이 지나 더위도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여 처서라 부르는데 낱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더위를 처분한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처서 때는 여름 동안 습기에 눅눅해진 옷이나 책을 아직 남아있는 따가운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쬘 폭ㆍ포, :쬘 쇄)’를 합니다. 또 극성을 부리던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는 속담처럼 해충들의 성화도 줄어듭니다. “처서에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오다가다 길에서 만났다.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귀뚜라미가 그 사연을 묻는다. ‘미친놈, 미친년 날 잡는답시고 제가 제 허벅지 제 볼때기 치는 걸 보고 너무 우스워서 입이 이렇게 찢어졌다네.’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모기는 귀뚜라미에게 자네는 뭐에 쓰려고 톱을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귀뚜라미는 ‘긴긴 가을밤 독수공방에서 임 기다리는 처자낭군의 애(창자)를 끊으려 가져가네.’라고 말한다.” 남도지방에서 처서와 관련해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단장(斷腸), 곧 애를 끊는 톱 소리로 듣는다는 참 재미있는 표현이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바람이 오면 - 도종환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간 갈 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동경 발간다래 / 새도록 노니다가 / 드러 내 자리랄 보니 / 가라리 네히로섀라 / 아으 둘흔 내 해어니와 / 둘흔 뉘 해어니오” 이는 《삼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나오는 것으로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 <처용가(處容歌)>다. 설화에서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밤에 그의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처용가>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났다. 그러자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아,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범하였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으니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부터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03년 MBC-TV에서는 300여 년 전 조선의 한성부 좌포도청에서 ‘다모’로 일했던 여자, 채옥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다모(茶母)>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배우 하지원은 주인공 채옥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쳐 호평을 받았지요. 여기서 ‘다모’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조선시대 궁중의 다방소속이 아닌 일반 관사(官司)에서 차와 술대접 등 잡일을 맡아 하던 관비(官婢)”라고 풀이했습니다. 그러나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1701년) 10월 20일 기사에 보면 “다모(茶母)는 원래 혜민국(惠民局)에 소속되어 있는 관비(官婢)다. 다달이 치르는 성적이 나쁜 여의(女醫)에게 혜민국 다모를 하도록 했는데, 뒤에 포도청 등에 소속되어 여성 범죄를 담당하기도 하였다.”라고 설명해놓았습니다. 사실 관리들이 모두 남자였던 포도청에서 여성 범죄자를 어떻게 처리할지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때 다모는 이에 적절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전하는 포도청 다모 채용 조건을 보면 키가 5척(척은 1m의 1/3)을 넘고 쌀 다섯 말을 번쩍 드는 힘과 막걸리 세 말을 단숨에 마시는 담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뜻밖에 유행의 괴질(怪疾)이 천리의 바다 밖에까지 넘어가 마을에서 마을로 전염되어 마치 불이 들판을 태우듯이 한 바람에 3읍(三邑)의 사망자가 거의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아! 이게 무슨 재앙이란 말인가? 예로부터 너희들의 고장은 남극성이 비쳐 사람들이 질병이 적다고 하는데, 이번 재앙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진실로 내가 덕이 없어 상서로운 기운을 이끌어 먼 곳까지 널리 감싸주지 못한 소치이므로, 두렵고 놀라워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이는 《순조실록》 25권, 순조 22년(1822년) 10월 19일 기록으로 멀리 제주도에 돌림병이 돌아 세 읍에서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라는 소식을 듣고 임금이 탄식하는 내용입니다. 지금이야 비행기로 연결되어 뭍의 돌림병이 순식간에 제주도에도 퍼지지만 그때는 쉽게 오가지 못하는 먼 섬이라 뭍의 돌림병에도 걱정이 없었는데도 한번 돌림병이 번지니 불이 들판을 태우듯 했다니 참으로 걷잡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돌림병이 번지면 벼슬아치들을 보내 여러 산천(山川)에 양재제(禳災祭, 재앙을 물리치려고 귀신에게 비는 제사)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883년 오늘(월 17일) 한국 첫 근대식 인쇄소 ‘박문국(博文局)’이 설립되었습니다. 특히 박문국은 신문ㆍ잡지의 편찬과 인쇄를 맡아보던 출판기관으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산하기관인 동문학의 신문발행 업무를 담당하려고 설치한 것입니다. 초대총재는 이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지낸 민영목으로 한성부 남부 훈도방(薰陶坊) 저동의 영희전(永禧殿) 자리에 있었으며 1883년 10월 우리나라 첫 근대 신문 <한성순보>를 발간했습니다. 《고종실록》에 "박문국을 설치한 지 몇 해가 되었는데 빚을 갚으려고 시골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폐단을 끼칠 뿐만 아니라 실효도 없으니 해당부서를 교섭아문(交涉衙門)에 넘겨 교섭아문으로 하여금 적당히 일을 처리하게 하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후 박문국은 문을 닫았는데 적자에 허덕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박문국이 1888년 문을 닫긴 했으나 한국 인쇄역사에서 큰 분기점을 마련한 것은 사실입니다. 박문국에서 사용한 활자는 조선 시대에 걸쳐 두루 쓰이던 나무로 만든 목활자(木活字)가 아닌, 당시로서는 신식이었던 납으로 만든 연활자(鉛活字)를 썼습니다. 인쇄기는 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