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는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제2차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뽑혔고, 200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올랐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위대한 무형유산 판소리는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소리꾼만 있어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판소리 소리꾼이 소리를 하기 위해서는 북으로 장단을 맞춰주는 고수(鼓手)'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북반주를 하는 고수는 연출가인 동시에 지휘자로는 명창의 소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해서 ‘1고수 2명창’이란 말이 있을 만큼 고수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고수는 추임새를 넣어 소리꾼이 소리를 신명나게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구실도 하는데 수많은 군사가 싸우는 장면에선 힘차고 복잡하게 쳐주고, 심청가에서 떡방아 찧는 소리를 할 때는 떡방아 소리처럼 쳐줍니다. 또 소리꾼의 소리가 느려지면 고수는 약간 빨리 쳐 빠르게 이끌어가고, 빠르면 늦춰주면서 속도를 조절합니다. 반대로 소리꾼이 기교를 부리기 위해 속도를 늘일 때 북장단도 같이 늘어지기(따라치기)를 하고, 소리꾼이 잘못하여 박자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斗束奇峯枕海雲 말 통 묶은 듯 기이한 봉오리, 바다 구름 베고 누었는데 夕霏斜照半山曛 석양 비끼는 저녁 비에 산 반쪽에 어둑어둑하네 聽傳道服頻來往 도복 입은 신선이 자주 왕래한다고 전해 들었는데 應候眞仙李使君 응단 진짜 신선인 나 이(李) 목사에게 안부 묻겠지 위는 1702년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 1653~1733) 목사가 쓴 <산방산을 바라보며(望山房)>란 한시(漢詩)입니다. 이형상은 제주에 목사로 부임하여 곳곳을 돌아보고 남긴 중요한 순간들을 1703년 화공(畫工) 김남길(金南吉)에게 그리게 하여 보물 제652-6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화첩을 남겼습니다(국립제주박물관 소장). 이 <탐라순력도>에는 귤림풍악(橘林風樂), 우도점마(牛島點馬), 정방탐승(正方探勝), 제주조점(濟州操點), 건포배은(巾浦拜恩) 등 곳곳을 돌아보는 그림 28쪽 포함 모두 43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 “산방배작(山房盃酌)”이 눈에 띄는데 이 그림은 목사 일행이 산방굴에서 술잔을 주고받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에는 산방굴 뿐만이 아니라 송악산(松岳山)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독자 한 분이 우리문화편지 제4677호 <“너무 예뻐요” 대신 “정말 예뻐요”로 쓰자>를 읽고 네이버 시사상식사전을 참고하라며 의견을 보내주셨습니다. 관심을 두고 의견을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시사상식사전에는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훨씬 뛰어넘은 상태를 뜻하는 부사다. 종전에는 ‘일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라는 뜻으로 부정적인 상황을 표현할 때만 쓰였다. 그러다 2015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이 ‘한계에 지나치게’를 ‘한계를 훨씬 넘어선 상태로’라고 그 뜻을 수정하면서 긍정적인 말과도 함께 쓰일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너무 좋다’, ‘너무 멋지다’ 등처럼 사용할 수 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물론 국립국어원 누리집의 ‘온라인가나다’(어문 규범, 어법, 표준국어대사전 내용 등에 대하여 문의하는 곳)을 보면 한 시민의 질문에 두 가지 다 쓸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답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문의한 모두 가능한 표현입니다. '너무'는 과거에 '일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를 뜻하여 부정적인 의미의 서술어와 어울렸으나, 사전 뜻풀이가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훨씬 넘어선 상태로'로 바뀌면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의 남대문은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숭례문을 남대문으로 바꾼 이름이다. 숭례문의 ‘례’의 뜻은 ‘예의’라는 뜻이다. 일본은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를 당연히 낮춰부르고 싶었을 것이다. 숭례문은 일본인들이 남대문으로 강제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성문의 이름을 바꿔버린 것이다.” 한 블로그에 있는 글입니다. 사실일까요? 하지만 “남대문”이란 말은 일제가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이는 《태조실록》 5년(1396) 9월 24일 치 기록입니다. 이로써 일제가 숭례문을 낮추기 위해 남대문이란 이름으로 고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초 태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 역대 임금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뽑혔고, 2008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올랐습니다. 그 종묘제례에는 제향할 때 여러 사람이 줄을 지어서 추는 춤으로 ‘일무(佾舞)’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무’라는 것은 열을 지어서 춤을 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일무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로 나뉘는데 먼저 ‘문무’는 붉은 홍주의(紅周衣)를 입으며, 왼손에 단소와 같이 구멍을 만들어 소리를 내는 악기 약(籥)을 들고 오른손에는 구멍이 세개 있는, 세로로 부는 악기 적(翟)을 들고 추는데 이 물건은 말과 글을 상징하는 것으로, 문덕(文德, 학문의 덕)을 기리는 춤입니다. 이와 달리 ‘무무’는 역시 홍주의를 입고, 왼손에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 은도끼나 칼을 드는데 이는 적을 격퇴하고 방어한다는 것을 상징하며 무덕(武德, 무인이 갖춘 덕망)을 기린 것이지요. 또 일무는 4가지로 나뉘는데 1줄에 8명씩 8줄로 64명이 추는 팔일무(八佾舞), 1줄에 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허물을 벗는다 - 이창년 허물을 벗는다 매미도 벗고 뱀도 벗고 우리도 벗는다. 허물을 벗으면 달라지는 게 있지 그렇게 우리도 달라지겠지 초승달이 보름달 되듯 보름달이 그믐달 되듯 어제가 오늘과 다르듯이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라고 그러나 묵은 세월이 주저앉은 너와 나는 별반 달라진 게 없구나 아니야 엄청 달라졌지 그동안 측은지심이 많이도 자라서 키를 재고 있는걸. 허물을 벗지 않는 파충류는 파멸한다고. 한다. 허물을 벗는 동안 엄청난 고통의 시간이겠지만 말이다. 애벌레가 어른벌레가 되려면 하나의 통과의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허물벗기는 파충류뿐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얘기다. 사람이 숨을 쉰다는 것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인데 낡은 사고를 버리지 않고 숨을 쉬고 있다면 그건 화석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본인이야 깨닫지 못한 채겠지만... 그래서 나이 먹은 이들이 젊은 친구들에게 ‘꼰대’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렸다. 물론 사람 모두가 최첨단을 향해 허물을 벗으려고 발버둥을 칠 필요는 없다. 하루 먹기 바쁜 일반 대중이 목숨 걸고 새로움을 추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삶 속에서 각자의 허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백범은 흉탄에 쓰러지고/ 단재는 수문랑(하늘의 벼슬)으로 멀리 갔네/ 가련한 손, 홀로 남은 심산 노벽자(늙은 앉은뱅이)/ 여섯 해 동안 삼각산 아래 몸져누웠도다.” 이 시는 심산 김창숙 (1879~1962) 선생이 병상에서 백범 김구와 단재 신채호 선생을 기리며 쓴 시입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으려고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 (1905)이 단행되자 스승 이승희와 대궐 앞으로 나아가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시작으로 1960년 4·19 직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의장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민족운동사 중심에 서 계셨던 분입니다.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자 130여 명의 뜻을 모아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등 해방이 되기까지 나라 안팎에서 독립운동의 맨 앞에서 뛰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수많은 사람 가운데 독립, 통일, 민주화 운동을 통틀어 심산 김창숙 선생을 따를 만한 이가 없다는 평을 받을 만큼 불굴의 정신으로 일관한 선생은 독립운동에 두 아들을 바치고 선생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를 못 쓰는 앉은뱅이가 되어 누울 집 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95년 전 오늘(8월 25일)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문학가로 꼽히며, 단편소설 <벙어리 삼룡이>를 쓴 나도향(羅稻香, 1902~1926)이 세상을 뜬 날입니다. 그의 대표작 <벙어리 삼룡이>는 1925년 '여명(黎明)' 창간호에 처음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은 1인칭 서술자 ‘나’가 등장, 15년 전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액자 소설의 형태를 지니고 있지요. 신분주의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벙어리라는 결정적 아픔을 지닌 삼룡이가 상전 아씨에게 연모의 정을 품으면서 어쩔 수 없이 반항으로 전환되는 갈등 이야기입니다. 초기의 낭만적 감상주의를 극복하여 인간의 진실한 애정과 그것이 주는 인간 구원의 의미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나운규 감독이 1929년에 영화화했고 1964년에는 신상옥 감독이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화했지요. 나도향은 이상화, 현진건,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파’라는 낭만파 활동을 했으며, 《백조》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후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 <환희>, <옛날의 꿈은 창백하더이다> 등을 발표합니다. 또 19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7월 8일 문화재청은 경복궁 동궁의 남쪽 지역에서 현대 정화조와 비슷한 시설을 갖춘 대형 화장실 유구(遺構)가 확인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경복궁 화장실은 왕세자가 거처했던 동궁과 관련된 하급 벼슬아치와 궁녀, 궁궐을 지키는 군인들이 주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문헌자료에 따르면 화장실의 규모는 4∼5칸인데, 한 번에 많게는 10명이 썼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 발굴된 화장실의 구조는 길이 10.4m, 너비 1.4m, 깊이 1.8m의 좁고 긴 네모꼴 석조로 된 구덩이 형태로 정화시설 내부로 물이 들어오는 입수구(入水口) 1개와 물이 나가는 출수구(出水口) 2개가 있습니다. 유입된 물은 화장실에 있는 분변과 섞이면서 분변의 발효를 빠르게 하고 부피를 줄여 바닥에 가라앉히는 기능을 하였고 분변에 섞여 있는 오수는 변에서 분리되어 정화수와 함께 출수구를 통해 궁궐 밖으로 배출되었지요. 이렇게 발효된 분뇨는 악취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독소가 빠져서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이 구조는 현대식 정화조 구조와 비슷하다고 하지요. 한국생활악취연구소 이장훈 소장에 따르면 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유구국(琉球國, 류쿠국)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가깝다. 어떤 사람은 맑은 날이면 한라산에 올라 유구의 산빛을 볼 수 있다 하였다. 그렇게까지 가깝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 정남쪽 바다 한가운데에 있고, 달리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없는 땅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왕래하는 일이 없다가 고려말 창왕(昌王) 원년(1389년)에 이르러 경상도 원수 박위에게 대마도를 공격하게 하자 유구의 중산왕 찰도가 소식을 듣고 신하 옥지를 보내 표문을 올리고 신하를 자칭하였다.” 위는 조선의 실학자 정동유가 조선의 역사문화와 자연환경, 풍속과 언어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고증하고 분석하여 백과사전처럼 엮은 책 《주영편(晝永編)》에 나오는 유구국 곧 지금의 오키나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때 유구국 신하는 왜구의 노략질로 붙잡혀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유황, 소목(蘇木, 한약재), 후추, 갑옷 등을 바쳤습니다. 유구국 곧 류큐왕국은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한 류큐 제도 일대에 있던 나라입니다. 13~14세기에 류큐 제도 일대에 형성되었던 지역 세력들이 15세기 초 통일 류큐왕조를 세우면서 독립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이후 명나라, 조선